비화를 들었다. 당시 리허설 과정에서 정명훈과 왕세자는 서로의 마음을 열었다. 하루는 왕세자가 정명훈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저도 언젠간 한국에 갈 수 있겠죠.” 그뿐 아니다. 2013년 초 일 왕실 행사에 참석한 모 인사에게 왕세자는 이런 말을 훅 던졌다고 한다. “슈베르트는 어떻게 돼 가나요. 언제 합니까.” 이 인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2007년 협연 당시 왕세자와 정명훈이 슈베르트의 곡을 공연하면서, “다음번 한국에서 협연을 하게 되면 슈베르트의 이 곡으로 하자”며 특정 곡을 지목했었기 때문이다. 왕세자는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소망은 박근혜·문재인, 또 한쪽으론 아베라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에 막혀 성사되지 않았다. 3류 정치의 한계다.
일왕과 정명훈이 나눴던 ‘먼’ 약속
광어·가자미눈 양국 정부로는 난망
민간이 ‘바른 눈’의 벽돌 쌓아가길
‘850년 피의 역사’로 불리는 아일랜드와 영국 관계를 보자. 양국의 역사적 갈등과 반목은 2011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일랜드 방문으로 ‘마무리’됐다. 하지만 이게 단기간에 이뤄진 게 아니었다. 1998년 평화협정을 맺고, 약속을 지켰다. 토니 블레어 영 총리는 “(과거) 아일랜드인들의 죽음은 오늘날까지 양국 모두에 고통으로 남았다”고 솔직히 사과했다. 아일랜드도 평가할 건 평가했다. 시계추를 과거로 돌리지 않았다. 경제 위기 때는 공조했다. 정부나 민간 할 없이 각종 행사를 꾸준이 개최했다. 벽돌 한 장 한 장 쌓듯 신뢰와 배려 쌓기를 했다. 아일랜드인은 환영할 준비가, 영 국왕은 사과를 할 준비가 됐다. 그런 후 엘리자베스 여왕은 아일랜드의 상징색 녹색 코트를 입고 아일랜드를 찾았다. 대성공이었다. 아일랜드 총리는 3년 후 답방했다. 시간은 걸렸지만, 서로가 확실한 정공법을 택해 뒷말이 안 났다.
우리 정부와 아베 정부는 이런 비전과 전략이 있는가. 벽돌을 쌓고 있는가, 지하실을 파고 있는가. 레이와 시대가 출범했으니 새로운 마음으로 해보자는 목소리만 들리지, 뭘 하나 제대로 해보려는 노력을 않는다. 과거만 따지는 ‘광어눈 청와대’나, 미래만 보자는 ‘가자미눈 아베 정권’이나 기대난망이다. 이 둘로는 불신을 거둘 수 없다. 그렇다고 정공법을 포기할 순 없다. 정부가 못하면 ‘바른 눈’을 갖는 민간이라도 꾸준히 벽돌을 쌓아가야 한다. 언젠가는 실현될지 모를 나루히토-정명훈의 슈베르트 협연을 꿈꾸며 말이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