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도 논리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을 받아야 진화한다"

중앙일보

입력 2019.05.07 09:08

수정 2019.05.07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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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부장판사를 지낸 도진기 변호사가 최근 신간 '판결의 재구성'을 출간했다. 김상선 기자

우리는 매일 사건·사고를 뉴스로 접한다. 사건·사고의 전말은 실시간으로 빠르게 업데이트되는 세상이지만 판결의 속도는 이에 미치지 못한다. 고등법원을 거쳐 대법원까지 갔다가 파기환송되면 몇 년씩 걸리기도 한다. 이처럼 긴 여정 끝에 나온 판결은 대중의 상식과 동떨어진 경우도 많다.
 
현직 부장판사를 거쳐 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도진기(52) 변호사가 판결의 내부를 들여다본 『판결의 재구성』(비채)을 출간했다. 책은 세상을 뜨겁게 달구며 논란이 됐던 판결 서른 개를 낱낱이 분석한다. '김성재 살인사건' '낙지 살인사건' 등 이해할 수 없는 판결로 사회적 공분을 산 사건은 물론 '2014년 도둑 뇌사 사건'처럼 여론이 분분한 사건에 대해서도 칼날을 들이밀었다.  

책 표지

 
해당 판결을 소개하며 분석하는 과정을 통해 저자는 "일부 판결들이 '논리 협곡', 즉 깊은 분석에 매몰돼 종합적인 판단력과 논리를 잃어버렸다"고 비판한다. 지난 3일 서울 서소문로 중앙일보에서 도진기 작가를 만나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성재 살인 무죄 판결의 논리적 허점
 
책에 등장하는 서른개 판결 중에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1995년에 있었던 듀스 김성재 살인사건이다. 5~6년 전 우연한 기회에 해당 사건의 판결문을 읽어봤는데 내적 논리가 전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론 자체를 떠나 논리 전개 과정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전까지는 나도 판사이다 보니 판결문에 대한 철저한 신뢰가 있었는데, 김성재 사건의 판결문을 계기로 판결문에도 논리적 허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다른 판결문도 살펴보게 됐다.
 
김성재 판결에는 어떤 허점이 있나. 
'논리 협곡'이 분명히 발견된다. 한 우물을 깊게 파 들어갈수록 보이는 하늘이 좁아지는 거다. 분석이 깊어지면 종합은 죽게 된다. 당시 김성재가 졸레틸이라는 약물로 사망했는데, 여자친구 김 모 씨가 졸레틸 한병을 구매한 사실이 확인됐다. 그런데 법원에서는 한병이 치사량이 아니라 여성이 범인이 아니라는 논리를 폈다. '졸레틸 1병은 치사량에 못 미치는데 김성재는 죽었다. 김미영은 졸레틸 1병만 구매했다. 따라서 김미영이 졸레틸을 주사해서 김성재를 죽인 게 아니다'라는 논리다. 


이 논리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우선 1병으론 용량이 부족하다는 판단부터 근거가 확고해 보이지 않는다. 당시 전문가는 졸레틸 1병으로도 사람을 죽일 만하다고 1심에서 밝혔는데, 2심에서 재판부는 동물 실험보고서와 약품 사용설명서를 근거로 삼아 독자적인 판단으로 1병 용량이 사람을 죽이기에 충분하지 않다고 결론 내렸다. 또한 법의학전문가의 사망 추정 시간에 대한 진술도 판사가 믿기 어렵다며 부정하고 독자적 판단을 내린다. 전문가의 증언을 무시하고 비전문가인 판사가 '따져 보니 그렇지 않다'는 식으로 결론을 내렸는데, 이는 판사의 오만이 지나쳤던 판결이다.

듀스의 멤버였던 김성재(왼쪽)과 김성재를 살해한 혐의를 받았던 여자친구 김모씨. [사진 중앙포토]

 
판결문에 대한 논리적 비판이 필요하다
 
왜 이런 사태가 발생하는 걸까.
판사는 시험을 잘 치고 성적을 잘 받은 사람인 것은 맞지만 그러기 때문에 논리 구조도 뛰어날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논리는 산술적인 전개가 전부가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공감을 받을 수 있어야 하는데, 판사들은 그간 판결의 논리에 대해 비판받아본 적이 없다. 비판을 받지 않으니까 나는 잘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거다. 자신이 어떤 결론을 내려도 사람들이 승복하기 때문에 평소 논리 연마가 부족하다.
 
판사들이 논리적 허점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판결문 논리에 대한 비판이 필요하다. 판결 결과를 두고 '유전무죄' 식으로 구호에 그치는 비판은 판사들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런 단순한 비판을 넘어 판결 내부의 논리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이 필요하다. 이런 과정이 있어야만 판결문이 진화할 수 있다.
 
판사 스스로 노력도 필요할 거 같다.
물론이다. 판사는 스스로 논리를 평생 갈고 닦아야 한다. 판사는 비판에 익숙하지 않은 존재이기 때문에 이게 쉽지 않을 수 있다. 나부터도 작가가 된 이후에야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작가가 된 이후 여러 비판을 받았는데 처음에는 납득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지만, 판에 익숙해지면서 다른 의견을 수용하게 됐다. 이런 경험을 통해 작가뿐 아니라 법조인으로서 성장했다고 믿는다. 

<도진기 변호사가 3일 중앙일보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법의 최종 지향점은 사회 질서
 
책에는 이 밖에도 정당방위와 심신미약과 관련된 판결이 나온다. 정당방위 관련 대표적인 사례는 2014년 도둑 뇌사 사건이다. 20대 이 모 씨는 자신의 집에 쳐들어온 도둑과 맞서 싸우던 중 결국 도둑을 사망에 이르게 했다. 이에 대해 법원은 정당방위를 인정하지 않고 상해치사로 1년 6개월 형을 선고했다. 이 판결을 두고 정당방위 성립 여지를 너무 엄격하게 보는 것 아닌가 하는 여론이 일었다.
 
정당방위 성립 조건이 너무 엄격하다는 여론이 많다.
젊은 친구는 억울하겠지만, 판사는 사적 보복을 금지한다는 입장에서 판결한 것으로 보인다. 사적 보복을 금지하는 것은 법이 근본적으로 정의보다는 사회 질서를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슈퍼 히어로는 정의를 실현하는 존재지만, 법적으로 보면 기물파손, 폭행죄를 피할 수 없는 범죄자다. 이처럼 법의 최종 지향점은 정의가 아닌 사회 질서다.
 
그렇다 해도 적정 수위를 조절하는 게 필요하지 않나.
정당방위는 실로 섬세한 '선 긋기'가 필요한 영역이다. 정당방위 범위를 넓혔다간 사회적 혼란이나 폭력을 조장할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반면 너무 좁게 인정하는 것도 당사자 입장에서 억울할 수 있다. 사건 하나 터질 때마다 거기에 맞춰 방향 없이 이리저리 움직일 문제는 아닌 거 같다.

도진기 변호사는 &#34;판결문에 대한 논리적인 비판이 판결문을 진화시킨다&#34;고 말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심신미약은 적용이 제한돼야 한다
 
이 밖에도 심신미약과 관련해 여론과 배치되는 판결이 많다.
개인적으로 판결에 심신미약을 적용하는 것은 제한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처벌은 개인에게 자유 의지가 있다는 전제하에 이뤄지는 것인데, 심신미약자를 특별 취급하는 것에 대해선 의문점이 많다. 법원은 모든 사람의 행동을 결정론적으로 받아들이고 의도가 아닌 결과를 우선시하는 곳이라는 점에서도 심신미약 적용은 모순이 있다. 다행히 최근엔 여론에 의해 심신미약 적용이 주는 추세다.
 
저술, 방송 출연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앞으로 계획은.
변호사 일을 계속하면서 추리 소설 같은 글을 쓰고 싶다. 또한 법원을 대상으로 건전한 비판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낼 예정이다. 법원에 있어 본 사람의 입장으로서 법원을 위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