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지난 2월 기아자동차의 통상임금 항소심에서 법원이 신의칙을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고 한 것과 비슷한 취지의 판결이다. 과거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신의칙 조항으로 통상임금 사건에서 기업에 유리한 여지를 주었다면 최근에 대법원이 다시 ‘아주 예외적인 경우’로 그 범위를 대폭 좁히는 모양새다.
노사합의해도 재정난 심각하지 않으면 오른 통상임금 반영해야
2013년 '신의칙'에 따라 기업에 유리한 판결했지만 이젠 엄격 적용
직원들 “통상임금 올랐으니 수당ㆍ퇴직금 더 줘야”
소송을 낸 직원들은 매년 6번에 걸쳐 정기적으로 상여금을 받아왔다. 하지만 이 상여금은 각종 수당과 퇴직금 산정의 기준이 되는 통상임금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앞서 노사가 ‘정기 상여금을 통상임금에서 제외한다’고 규정한 단체 협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상여금을 합친 통상임금을 기준으로 회사가 퇴직금을 추가로 지급하라”며 소송을 냈다.
2013년 전합이 내건 신의칙 “기업 어렵다면…”
당시 이 신의칙 조항 때문에 대법원 전합이 기업에 유리한 길을 열어준 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왔다. 한진중공업 사건에서도 1ㆍ2심은 신의칙을 이유로 상당수 회사 측 손을 들어줬다. 1ㆍ2심 재판부는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해 추가 수당 등을 준다면 장기적인 경영난 상태에 있는 한진중공업이 예측하지 못한 새로운 재정적 지출을 하게 됨으로써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이 초래된다”고 설명했다.
대법원 “아주 중대한 재정난 아니면 추가 수당 줘야”
이날 대법원 1부는 버스 운전기사 박모씨가 예산교통을 상대로 “정기 상여금을 합친 통상임금을 기준으로 약 3600만원의 퇴직금을 더 지급하라”며 제기한 소송에서도 같은 취지로 사건을 대전지법에 돌려보냈다고 밝혔다. 항소심은 회사의 재정난을 이유로 박씨의 청구가 ‘신의칙에 위반된다’고 판단, 회사가 대부분 돈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봤다. 하지만 대법원은 회사가 박씨에게 3600만원을 더 준다고 해도 이는 회사의 연 매출액에 비하면 1%도 되지 않는다며 추가지급 액수를 다시 계산하라고 했다.
엄격해진 신의칙…노동자 ‘환영’ 기업 ‘반발’
대법원 관계자는 “기존 (시영운수와 기아차의) 대법원 판결은 통상임금 재산정에 따른 노동자들의 추가 법정수당 청구에 대해 신의칙이 적용될 수 있으나 신중하고 엄격히 판단해야 한다고 했는데, 이번 판결은 퇴직금 청구에 대해서도 이런 원칙이 적용됨을 처음으로 판시했다”며 의미를 설명했다.
이에 대한 재계와 노동계의 입장은 엇갈린다. 지난 2월 대법원 판결이 나오자 한국경영자총협회는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과 다른 기준을 새롭게 제시하는 것은 전합 판결로 형성된 신뢰를 깨트리는 것”이라며 반발했다. 반면 민주노총은 “노동자들이 마땅히 받아야 했을 임금을 두고 경제에 중대한 위협이 된다는 주장은 적절치 않다고 한 재판부의 지적을 새겨들어야 한다”고 밝혔다.
박사라 기자 park.sara@joongang.co.kr
신의칙이란
상대방을 배려하고 신뢰를 저버리지 않아야 한다는 신의성실의 원칙. 통상임금 소송에서 과거 노사가 정기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하지 않는 것으로 합의했다면, 노동자에게 통상임금이 오른 데 따른 추가 임금 지급을 제한할 수 있다는 의미다. 회사가 예상치 못한 비용을 지출해서 경영난에 빠지게 될 경우 노사 모두 불리해지기 때문이다. 대법원은 최근 회사가 심각한 재정난을 겪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신의칙을 인정하지 않는 추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