퀘이커 교도인 엘리자베스 바이닝도 있겠다. 1946년부터 4년간 아키히토 왕세자의 교사였다. 자신의 수업에선 왕세자도 여느 아이처럼 영어 이름(Jimmy)으로 불리도록 했다. 아키히토 일왕이 동시대 일본인보다 훨씬 더 자유주의적이며 평화주의적 태도를 보인 건 바이닝의 영향 때문일 것이라고들 말한다. 바이닝은 히로히토 일왕이 자신을 선택했다고 믿었다. 실제론 미 군정의 결정으로 알려졌다. 맥아더가 직접 바이닝에게 교육 상황을 묻기도 했다고 한다.
전후 일본은 이런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다. 일본학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이안 부루마는 “평화주의는 일본인을 지키기 위해 외부에 완전히 의존하게 만드는 대가를 지불했다. 이는 우파들의 복고주의를 되살아나게 했으며, 합의가 있어야 마땅한 자리에 한 가지 문제에 대한 양극화된 정견이 대두했다. 문제는 헌법 그 자체였다”(『근대 일본』)고 썼다. 우린 일본의 불쾌한(또는 부당한) 면에만 집중하곤 한다. 그러나 이해하고 살펴야 할 복잡미묘한 맥락도 있다. 일왕 교체를 보며 든 생각이다.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