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부터 기타와 피아노의 앙상블을 위해 쓰인 곡은 없어요. 편곡으로 함께 연주할 곡을 만들고, 또 상대방의 소리를 잘 들으며 내 소리를 맞추는 것이죠. 한·일 관계도 그런 배려가 필요합니다. 수학 공식으로 풀 문제는 아니니까요."
다음달 16일 일본의 기타리스트와 함께 도쿄 하마리큐 아사히홀에서 공연하는 피아니스트 이경미(57ㆍ경남대 교수)를 지난 12일 도쿄의 찻집에서 만났다.
최악 한일관계 속 도쿄 공연 피아니스트 이경미 인터뷰
25년 전 만난 연주, 투병 동반자 日 기타리스트와 공연
"상대방 소리 먼저 듣고 내 소리 맞춰야 앙상블 완성"
NHK가 연습 과정에 밀착 취재, 보수 산케이도 관심
"음악이 외교에 역할해야" 지인 조언에 공연 앞당겨
"더 나이 들기 전에 둘 만의 추억을 한 번 더 만들자"는 취지로 출발한 이번 공연은 처음엔 11월로 예정돼 있었다. 하지만 "음악이 양국관계에 빨리 역할을 해달라", "일본의 새 일왕이 즉위하는 5월이 좋겠다"는 지인들의 권유로 일정을 당겼다. 공연에서 무라지는 로드리고의 ‘아랑훼스 협주곡’ 을 이경미의 피아노 반주로 연주한다. 후반부엔 이경미가 쇼팽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관악4중주와 협연한다. NHK가 연주회 준비 전 과정을 밀착 취재하는 등 일본 내 관심도 뜨겁다.
-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일본에서 졸업했고, 아오야마대에서 국제정치학 공부도 했다.
- "과거 일본 대사관에서 근무했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 무라지 가오리와의 첫 대면을 기억하나.
- "25년 전 이탈리아에서 서로 길을 찾고 있었다. 동양인이 별로 없는 곳에서 어린 소녀가 기타를 들고 서 있는 게 너무 인상적이었다. 그 다음해인가 가오리가 독주회를 위해 한국에 왔는데 통역이 갑자기 못 오게 돼 한밤중에 내게 도움을 청했다. 하루 종일 무라지를 위해 통역을 했고, 서로 마음을 열게 됐다. 서울에선 여러 번 공연을 함께 했고, 일본에선 이번이 세 번째다."
- 두 분의 암 투병 스토리도 유명하다.
- "2009년엔 내 수술 소식을 들은 가오리가 달려왔다. 이럴수록 화려한 옷을 입어야 한다고 분홍색 옷도 사 왔다. 3년 뒤엔 가오리가 투병할 때는 내가 일본에 가서 온천, 레스토랑을 함께 다녔다. 난 재작년 완치 판정을 받았고, 가오리도 완치됐다."
- 2011년 재기 무대도 일본 산토리홀 공연이었다.
- "암 판정을 받고 2년간은 정말 힘들었다. 밖에도 잘 안 나가고 잠도 못 잤다. 그런데 일본 공연을 도왔던 일본인 매니저가 ‘다시 피아노를 쳐야 한다’고 독려하며 다짜고짜 산토리홀을 빌렸다. 그래서 '죽더라도 이건 하고 죽어야겠다'는 심정으로 두 달간 연습하고 재기했다. "
- 최악의 한일관계 때문에 공연이 더 주목받는 것 같다.
- "11월에 하려고 했는데 오구라 가즈오(小倉和夫ㆍ80) 전 주한일본대사 등 주변 분들이 ‘이왕이면 지금이 어떠냐’고 권유했다. 한일관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누구나 말하면서도 나서는 사람이 없다고 하더라. ‘음악이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에 일정을 앞당기게 됐다."
- 한·일관계 개선을 위한 조언이 있다면.
- "우리 둘은 연주를 할 때 언제나 자기의 소리보다 상대방의 소리를 들어준다. 그래야 부드럽고 절묘한 음색이 만들어진다. 기타는 악기도 작고 소리도 작고 섬세하다. 반대로 피아노는 크다. 오케스트라 반주곡을 피아노 반주곡으로 편곡하고, 또 상대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불가능할 것 같던 연주도 가능해진다. 한·일관계에도 이런 배려가 필요하다."
- 배려 외에 필요한 게 있다면.
- "전쟁과 지진의 영향인지 일본인들은 경계심이 많다. 마음을 잘 열지 않는다. 10년이 지나야 조금 마음을 연다. 솔직히 이번에 (주일) 대사가 바뀌었는데, 2년 만에 바뀌는 건 좀 아닌 것 같다. 누가 하더라도 갑자기 좋아지지는 않는다. 기다릴 필요가 있다."
- 일본 내 기대도 뜨겁다.
- "NHK는 서울과 도쿄에서의 연습 과정까지 모두 취재하고 있다. 공연 다음날 뉴스에 생방송으로 출연한다. 또 (한국에 비판적인) 산케이 신문도 인터뷰를 크게 실었다. 저희도 깜짝 놀라고 있다. 재일동포 친구들이 많은데 여기서 살기가 참 불편하다. 우리가 정치인은 아니지만, 일본에서 열심히 사는 동포 친구들이 원한다면 무엇이든 하고 싶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sswo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