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72>
우궈쩐의 부친은 교육열이 남달랐다. 신식 교육 체제가 일천하다 보니 좋은 학교가 드물었다. 전국을 헤맸다. 1907년 젊은 교육자 장보링(張伯齡·장백령)이 톈진(天津)에 난카이(南開)중학을 설립하자 큰아들을 입학시켰다. 장보링은 미국 유학 시절 존 듀이의 직계 제자였다. 학계에 명성이 높았다. 3년 후 대학 간판도 내걸었다.
함께 잡지 만들고 극단도 조직
여 주인공 맡은 저우 빼어난 연기
20명 암살한 혐의로 쫓기던 저우
친구가 알아보자 아니라 잡아떼
중일전쟁 때 국공합작 하면서
장제스, 지명 수배 된 저우 중용
형 손 잡고 톈진에 온 우궈쩐은 난카이중학에 응시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신입생 500명 중 나이도 가장 어렸다. 교장 장보링은 우궈쩐을 친자식처럼 총애했다. 매일 밤 기숙사 찾아가 차 낸 이불 덮어 줬다. 장보링은 엄한 스승이었다. 잘하면 칭찬하고, 실수하면 엄하게 질책했다. 격려도 잊지 않았다. 1951년 2월 장보링의 장례식에 참석한 타이완성 주석 우궈쩐이 장징궈(蔣經國·장경국)에게 이런 말을 했다. “성장기에 가장 많은 도움을 준 분이다. 지금은 선생 같은 교장이 너무 적다. 나의 유일한 유감이다.”
저우언라이와의 첫 만남은 입학식 일주일 후였다. 워낙 일찍 중학생이 되다 보니 저우가 다섯 살 많았다. 학년은 1년 위였다. 하루는 저우 따라 극장에 갔다. 더글라스 페어뱅크스가 달타냥으로 나오는 삼검객(삼총사) 보며 배꼽을 잡았다. 이날을 계기로 저우와 우궈쩐은 붙어 다녔다. 밥 같이 먹고 산책도 함께했다.
저우언라이는 달랐다. 우궈쩐의 구술을 소개한다. “난카이중학 시절 내 눈에 비친 저우언라이는 유교 신봉자였다. 장차 공산주의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면 목숨을 걸어도 좋다며 부인했을 것이다. 사실은 정반대였다. 저우는 중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영향을 끼친 공산주의자로 변했다. 귀국 후 상하이 거리에서 본 적이 있었다. 수염 기르고 변장한 모습이었지만 내 친구 저우언라이가 분명했다. 저우는 나를 모르는 체했다. 내가 우궈쩐이라고 몇 번 말해도 자기는 저우언라이라는 사람이 아니라며 잡아뗐다. 1938년 우한(武漢)에서 공적으로 만났다. 상하이에서 나를 만나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런 일 없었다며 의아한 표정 지었다. 저우언라이에 관한 비밀 문서를 본 적이 있었다. 상하이에서 만났을 때 저우는 비밀조직을 관장하던 테러리스트였다. 두 살짜리 어린애를 포함, 배신자 가족 20명을 암매장한 암살자 혐의로 도망 다니던 중이었다. 나를 보고 얼마나 당황했을지 짐작이 간다.”
1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중국홍군은 국민당군에 편입됐다. 군사위원회 위원장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현상금까지 걸었던 지명수배자 저우언라이를 군사위원회 정치부 부부장에 임명했다. 중장계급도 수여했다. 저우의 비공식 직함은 특구(特區)정부와 8로군 대표였다.
같은 해 11월, 일본군이 상하이를 점령했다. 수도 난징(南京) 공격도 시간문제였다. 충칭을 전시수도로 정한 국민정부는 한동안 우한에 집결했다. 저우언라이는 충칭과 우한을 부지런히 오갔다.
상하이에서 모르는 체하던 저우언라이가 우한 시장 우궈쩐을 먼저 찾아갔다. 부재중이자 명함을 놓고 갔다. 귀가한 우궈쩐에게 부인 황쭤췬(黃卓群·황탁군)이 명함을 건넸다. “네 공산당 친구가 다녀갔다.” 우궈쩐이 저우언라이의 사무실로 갔다. 저우의 화려한 연기가 시작됐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