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는 재계엔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노조엔 한없이 자애롭지만, 대기업엔 엄했다. 노조의 범법엔 솜방망이를, 대기업의 미운 짓엔 철퇴를 들이댔다. 기업가 정신을 북돋기보다 국민 정서법에 기댔다. 대한항공은 좋은 먹잇감이었다. 물컵 사건은 18차례의 압수 수색으로 이어졌다. 11개 국가 기관이 동원됐다. 관세청은 6번이나 뒤졌다. 아무것도 안 나왔지만, 법원은 수색영장을 계속 발부해줬다. 대한항공 관계자는 “연일 이어지는 압수 수색에 대응을 포기했다. 나중엔 그런가 보다 했다”고 했다.
국가 권력의 오·남용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나
기업은 기업인에겐 ‘목숨’
이런 충격이 조 회장의 죽음을 부른 원인 중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본질은 따로 있다. 조양호 회장의 죽음은 국가 권력의 오·남용이 어디까지 허용돼야 하는지 묻고 있다. 지난 정부도 책임을 면할 수 없다. 2016년 박근혜 정부는 한진그룹을 혹독하게 다뤘다. 조 회장을 평창올림픽 조직위원장 자리에서 사실상 통보도 없이 물러나게 했다. 위기에 몰린 한진해운엔 유독 가혹한 잣대를 들이댔다. 박 전 대통령은 “도덕적 해이, 무책임, 묵인하지 않을 것”이란 말까지 했다.
당시 조 회장은 대통령의 발언을 전해 듣고 안색이 창백해졌다고 한다. 비선 실세 최순실의 요청을 거부하다 괘씸죄에 걸렸다는 말이 돌았다. 진상을 물어보려 했지만 청와대는 “(담당 부처인) 금융위원장과 상의하라”며 잘랐다. 배임을 무릅쓰고 1000억원의 사재 출연을 약속했지만 금융위는 “1조원을 지원하라”며 막무가내였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가, 육로가 막혀 70%의 물량을 배로 실어나르는 나라가, 세계 7위, 대한민국 1위 해운사를 그렇게 퇴출시켰다.
조양호 회장은 사석에서 “한진해운을 뺏겨서가 아니다. 국가 경쟁력 차원에서 한진해운은 절대 없애선 안 됐다”며 두고두고 가슴앓이했다고 한다. 한국의 해운은 그때 잃은 경쟁력을 지금껏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A 씨는 “기업인에게 기업은 목숨과도 같다. 한진해운이 죽은 그때, 조 회장도 반쯤 죽은 목숨이었다”고 했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 회장은 최근 “성공한 대기업 없이 부강한 국가는 없다”고 했다. 조양호 회장은 죽음으로 묻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대기업을 정권의 쌈짓돈으로 여기기 일쑤요, 대기업=갑질=적폐로 모는 유치한 권력들이 성공한 대기업마저 없애고 있지 않은가. 여기에 무슨 보수·진보, 좌우가 있단 말인가. A 씨는 조 회장의 죽음을 “국가 권력 오·남용에 의한 살인”으로 규정하며 책임을 “박근혜 반, 문재인 반”이라고 했다. 내 생각도 그렇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