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식 경제 모델, 일단 한다면 북한이 더 성공"

중앙일보

입력 2019.03.13 00:05

수정 2019.03.13 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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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의 논설위원이 간다]  '도이머이'로 우뚝 선 베트남

지난 2월 28일 북미 정상회담이 열린 베트남 하노이 중심가 디엔비엔푸 거리에서 오토바이들이 일제히 출발하고 있다. 남정호 기자

 
2차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베트남식 발전 모델에 관심이 뜨겁다. 지난달 말 열린 회담 장소가 하노이로 결정된 데에는 베트남을 보고 배우라는 미국 측의 속뜻이 작용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이런 뜻을 받아들일지는 두고 볼 일이지만 회담 기간 중 그의 측근들은 베트남 곳곳을 둘러봤다. 공산당 일당 지배체제를 버리지 않고도 얼마든지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음을 이들은 베트남에서 목격했을 것이다. 베트남식 성장의 비결과 문제점을 현장에서 짚어봤다.  
 

지난달 28일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 중심가에서 오토바이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고 있다. 남정호 기자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던 지난달 28일 베트남 하노이의 디엔비엔푸 거리. 회담장인 메트로폴 호텔에서 1km 남짓 떨어진 이 큰길에는 수백 대의 오토바이가 신호등이 바뀌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파란 등으로 변한 순간, 모든 오토바이가 "부르릉"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한꺼번에 출발했다. 봇물 터지듯 오토바이들이 한꺼번에 몰려가는 모습이 여간 장관이 아니다. 어느 동남아 국가보다 빠르게 성장 중인 베트남의 활기를 실감할 수 있는 현장이다.

베트남의 외국인 직접투자와 경제성장

 꽉 막힌 계획경제로 신음했던 베트남이 어느새 아시아 최고의 유망주로 변신해 숨차게 뛰고 있다. 무엇보다 경제적 성과가 눈부시다.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7.08%. 동남아 최고 수준으로 2008년 외환위기 이래 가장 높은 수치다. 성장의 원동력은 외국인투자로 지난해 191억 달러를 기록, 전년보다 9.1%나 늘었다. 해외에서 베트남 경제를 얼마나 밝게 보는지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30여년 전까지만 해도 베트남은 비효율적인 공산당 독재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1986년 '도이머이(Doi Moi·쇄신)'란 깃발 아래 과감한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나라를 개방하면서 싹 달라졌다. 

베트남 세계정치경제연구소(IWEP)응으웬 듀지 러이 편집장은 지난달 28일 "우수한 인적자원 덕에 북한이 베트남식 모델을 답습한다면 훨씬 더 성공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남정호 기자

  베트남 최고의 싱크탱크인 세계정치경제연구소(IWEP)의 응으웬 듀지 러이 편집장은 "잘못된 정책으로 성장률이 - 6%로 떨어지고 물가가 600%까지 치솟아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이런 형편이라 베트남 정부는 우선 동맥경화에 걸린 국유기업들을 차례로 민영화했다. 문을 활짝 열고 외국 자본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각 부문의 효율을 높이기 위해 국가 경제의 체질을 완전히 바꾼 것이다. 이 덕에 베트남의 경제 규모는 30년 만에 15배나 늘었다.
물론 경제 개방과 개혁을 추진한 동남아 국가는 베트남뿐만이 아니다. 이 나라 이상으로 임금이 싸고 자원이 풍부한 나라가 즐비하다. 그런데도 베트남의 잠재력이 최고로 평가받는 까닭은 뭔가.

베트남 하노이에 세워져 있는 공자 사당 '반미에우'의 거대한 정문. 출처: flickr

의문은 하노이 중심에 자리 잡은 '반미에우(Van Mieu·文廟)'에 가보면서 풀렸다. 하노이역 앞에 있는 이곳에 도착하니 흰 돌로 만든 큼직한 대문이 인상적이었다. 숲이 울창한 덕분인지, 번잡한 하노이 시내에 이처럼 고즈넉한 곳이 있나 싶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붉은 기와를 인 목조건물이 나타났다. 반미에우 본관이다.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반미에우(文廟)'의 본관 건물. 하노이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으며 이곳에서 과거시험이 시행됐다. 남정호 기자

반미에우란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의 베트남식 발음이다. 실제로 이곳에는 공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11세기에 지은 이곳 건물들은 유학자를 키우기 위한 이 나라 최초의 고등교육 기관이기도 했다. 고려 때 세운 국자감(國子監)인 셈이다. 과거 베트남에서 한국 못지않게 유교가 성행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실제로 반미에우 내 마당에서는 1000년 전부터 과거시험이 치러졌다고 한다. 게다가 급제한 선비들의 인적사항을 새긴 비석들도 80여개나 남아있다.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공자 사당 '반미에우'에는 과거시험에 급제한 인물들의 인적사항을 새긴 80여 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남정호 기자

 이처럼 학문을 숭상하고 윗사람에 예의를 지키는 유교적 전통이 강한 덕분에 베트남인들은 한국인 못지않게 부지런하고 교육수준도 높다는 평을 듣는다. 인구도 젊어 9550만 인구의 평균 연령은 30.5세에 불과하다. 한국(41.0세)은 물론 중국(37.4세)보다도 7세 가까이 젊다. 게다가 제조업 평균 임금은 230여 달러로 중국의 3분의 1도 안 된다. 여러 면에서 한국·대만 등에 이은 촉망받는 신흥개발국이 될 자질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북한은 이런 베트남식 발전 모델을 받아들이려 할 것인가. 만약 수용한다면 베트남처럼 성공할 수 있을까. 러이 편집장은 "베트남식 모델을 답습할지는 모르지만 일단 한다면 북한이 더 성공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장거리 미사일에 핵무기까지 만들어내는 우수한 인적 자원을 갖추고 있기에 베트남보다 훨씬 더 빠른 성장이 가능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문제는 베트남식 성장을 북한이 바라느냐다. 베트남 외에 공산당이 개방화에 성공한 것으로는 중국식 모델이 있다. 중국 역시 계획경제를 유지하다 1980년대 덩샤오핑(鄧小平)의 주도 아래 시장경제 및 개방화를 도입, 세계 2위의 경제 대국으로 올라섰다. 
 하지만 두 모델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베트남식은 외국계 기업 유치를 통해 국내 생산을 늘린 뒤 이를 수출하는 모델이다. 이 때문에 회사 설립 때부터 외국 기업들의 자유로운 활동이 철저히 보장된다.
반면 중국은 외국계 기업들을 열심히 유치했다는 점은 마찬가지지만 기술을 이전받기 위해 오만 조처를 했다. 중국 기업과 세운 합작회사를 통하지 않고서는 영업을 할 수 없도록 하는 게 대표적인 사례다. 그래야 중국 회사들이 외국기업의 노하우를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밖에 베트남이 한꺼번에 전면 개방을 단행한 반면 중국은 지정된 특구를 우선 연 뒤 점진적으로 확대해 왔다는 사실도 다른 점이다. 
이런 특성 탓에 베트남의 고민은 적지 않다.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제품을 생산하는 베트남 기업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김기준 KOTRA 동남아대양주지역본부장은 "외국 투자기업만 있을 뿐 기술력을 갖춘 토종기업이 없다 보니 베트남 내에는 '하청공장에서 못 벗어난다'는 우려가 크다"고 전했다. 

올 후반기부터 판매될 베트남 최초의 양산 자동차 빈패스트 세단. 지난해 파리 모터쇼에서 처음으로 선보였다. 출처: VinFast

이런 터라 베트남 정부는 고심 끝에 양대 기업 중 하나인 빈그룹 측에 자동차 생산을 권유했다고 한다. 결국 빈그룹은 부동산업이 주력임에도 2017년 빈패스트(VinFast)라는 자동차 회사를 세우고 올해 말부터 세단과 SUV 판매를 시작할 예정이다. 베트남 정부는 또 한국의 발전 모델을 배우기 위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을 본뜬 한-베과학기술연구원(VKIST)을 내년 중에 출범시킨다고 한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를 모델로 2020년 베트남 하노이 근교에 세워지는 한-베 과학기술연구원(VKIST) 조감도. 제공:KIST

이같은 장단점으로 북한이 베트남식 발전 모델을 택할지는 불확실하다. 다만 베트남과 중국의 사례를 볼 때 시장경제를 들여오면 김정은 독재체제는 무너지게 돼 있다는 서방학자들의 진단은 맞지 않을 공산도 크다. 중국과 베트남 공산당 모두 개혁·개방을 추진하고도 여전히 건재한 게 사실이다. 이는 공산당이 식민지 청산과 빈곤 탈피 등을 통해 민심을 얻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많다. 아울러 중국이나 베트남 모두 왕권이 존중되는 유교적 전통이 강해 공산당 독재에 대한 거부감이 덜하다는 해석도 나온다.
 이 때문에 김정은이 베트남과 중국 사례를 연구했다면 별 주저 없이 시장경제를 추구할 가능성이 크다. 정권을 빼앗긴 뒤 최악에 상황에 이를 위험이 그리 높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히 어떤 발전 모델을 고르는 게 좋을지 선택의 문제가 남게 되는 것이다. 
러이 편집장은 이에 대해 "북한은 베트남과 중국 모델의 각기 다른 장점을 취하려 할 것"이라며 "아울러 정부가 주도적으로 산업화를 밀어붙였던 남한의 모델을 가장 선호할 가능성이 크다"고 진단했다.
<하노이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