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에서 김정은은 “비핵화할 준비가 돼 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런 의지가 없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이긴 하지만, 육성으로 비핵화 의지를 공개적으로 밝힌 것은 처음이다. 그럼에도 국민의 절대 다수가 북한의 핵 포기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는 건 왜일까.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는
현 단계서 실현 불가능한 목표
선 비핵화에서 선 신뢰 구축으로
목표 바꾸는 발상 대전환 필요
하노이에서 김정은은 영변 핵시설을 폐기하는 조건으로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중 일부 핵심적인 제재의 해제를 요구했다. 트럼프의 대답은 ‘노(No)’였다. 영변 핵시설 폐기가 큰 카드인 건 맞지만, 사실상의 전면적 제재 해제와 맞바꿀 정도는 아니란 것이다. 거래를 원한다면 영변 이외의 핵시설과 핵·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WMD)도 폐기 대상에 포함하라고 받아쳤다. 미국의 국내정치적 요인 탓에 트럼프가 ‘빅딜’을 집어 들면서 갑자기 판이 커진 꼴이다.
하노이 회담 결렬을 계기로 트럼프 행정부는 완전한 비핵화 이전에 제재 해제는 없다는 종래의 ‘선(先) 비핵화, 후(後) 보상’ 입장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북한을 압박할 수 있는 실효적 수단은 강력한 제재뿐이라는 판단 하에 추가 제재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다. 일부 예상대로 북한이 인공위성 발사를 내세워 장거리 로켓을 쏘아 올린다면 대화 국면은 중단되고, 경제·군사적 최대 압박 국면으로 회귀할 가능성이 크다. 한반도의 봄이 허무하게 끝나면서, 다시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올 수 있다.
지난달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 비확산 소위 위원장인 브래드 셔먼 의원(민주)은 “김정은이 모든 핵무기를 포기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철저한 감시를 전제로 제한된 수의 핵무기 보유를 용인하는 대신 미사일 기술 관련 프로그램을 동결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앞서 로버트 게이츠 전 국방장관은 북한의 완전한 핵 포기가 불가능한 현실을 인정하고, 북한에 10~20개의 핵무기 보유를 용인하되 더이상 핵무기나 운반수단을 개발하지 못 하게 할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제임스 클래퍼 전 국가정보국장(DNI)이나 윌리엄 페리 전 국방장관, 리언 페네타 전 중앙정보국(CIA) 국장도 비슷한 입장이다. 북한이 보유한 단·중거리 핵미사일의 인질이 된 한국과 일본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다.
싱가포르 공동성명에서 북·미 정상은 “상호 신뢰 구축이 한반도 비핵화를 추동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 70년 가까운 불신과 적대 관계의 산물인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뢰 구축이 필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한 셈이다. 양측이 서로 신뢰를 쌓아감으로써 북한 스스로 핵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북핵 문제의 궁극적 해법이다. 북·미가 공동으로 영변 핵 단지를 해체하는 경험을 공유하는 것은 상호 신뢰 구축에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하노이의 합의 실패는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빅딜을 통해 일괄타결을 하더라도 비핵화의 실제 이행에는 긴 시간이 걸리고, 수많은 난관이 따를 수밖에 없다. 신뢰 없이는 비핵화의 진전이 어렵다.
실현 불가능한 목표인 줄 알면서 계속 매달리는 것은 신기루를 좇는 어리석음에 불과하다. 선(先) 비핵화에서 선(先) 신뢰 구축으로 목표를 재설정하는 것이 북핵 딜레마에서 벗어나 완전한 비핵화로 가는 지름길일 수 있다. 상자를 깨는 발상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배명복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