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사실상 구금” MB 한때 “구치소가 낫지 않겠나”

중앙일보

입력 2019.03.07 00:05

수정 2019.03.07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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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전 대통령이 6일 오후 동부구치소를 나서고 있다. [장진영 기자]

“피고인은 자택에 구금된 것과 같은 상태에 놓이게 된 겁니다…숙지하셨습니까?”(정준영 부장판사)
 
이명박 전 대통령이 구치소에서 풀려났어도 완전한 자유의 몸이 된 건 아니다. 6일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법 형사1부(부장 정준영)가 그를 석방하며 사실상 ‘자택 구금’ 수준의 엄격한 보석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MB 구속 만료 43일밖에 안 남아
재판부, 엄격한 보석이 낫다 판단
외부인 면회에 전화·문자도 금지
법조계 “말만 보석이지 가택연금”

이날 보석 조건을 설명하기에 앞서 재판부는 보석 허가가 ‘오로지 재판을 충실히 진행하기 위한 것’이라며 선을 그었다. 다음달 8일이면 이 전 대통령이 구속 기한 만료로 풀려나기 때문에 차라리 엄격한 조건을 붙여서 석방하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다. 최근 이호진 태광그룹 회장의 ‘황제 보석’ 논란을 의식한 듯 건강 문제로 인한 병보석이 아니라는 점도 강조했다.
 
그동안 이 전 대통령 사건은 김인겸 부장판사(현 법원행정처 차장)를 중심으로 한 재판부가 진행했다. 하지만 지난 2월 법원 정기인사로 지금의 재판부로 변경됐다. 오는 4월 8일 만료되는 이 전 대통령의 구속기한까지 1개월쯤 남겨둔 시점이었다.
 

이 전 대통령을 태운 차량이 서울 논현동 자택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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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월 동안 방대한 사건기록을 검토하고 선고까지 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재판부가 판단한 결과로 보인다. 1개월 동안 무리해서 선고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온다고 해도 전직 대통령이 피고인인 중대한 사건을 충분히 검토하지 않고 속전속결로 재판했다는 비판이 나올 수 있다. 실제로 재판부도 “구속만기일에 판결을 선고한다 해도 재판부에게는 고작 43일밖에 주어지지 않았다”며 “채택한 증인 중 심리를 마치지 못한 증인의 숫자를 감안하면 구속만기까지 충실한 심리를 끝내고 선고하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이 전 대통령에게 보석 보증금으로 10억원을 낼 것을 요구했다. 변호인단에서 제시한 1억원보다 10배 많은 금액이다. 다만 이 전 대통령은 이날 보석금 대신 보증보험증권(1000만원 납부)을 제출하고 풀려났다. 법원은 당장 거액의 현금을 마련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소액의 보험료(1%)를 내고 법원에 보증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보석금을 대신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주거지는 논현동 사저 한 곳으로 제한했다. 이 전 대통령은 앞으로 병원에 진료를 받으러 갈 때마다 법원의 사전 허가를 받고, 복귀 후에도 법원에 보고해야 한다. 당초 변호인단은 서울대병원도 주거지에 포함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재판부는 “입원할 정도의 진료가 필요하다면 오히려 보석 허가를 취소하고 구치소 내 의료진의 도움을 받는 게 타당하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또 배우자와 직계 혈족 및 그 배우자, 변호인 외에는 누구도 만나거나 연락할 수 없게 했다. 문자·e메일·전화 모두 금지된다. 주거지 인근의 서울 강남경찰서로부터 감시도 받게 된다. 이 전 대통령 본인도 매주 재판부에 시간별 활동 내역 및 보석 조건 이행 상황을 보고해야 한다. 만일 보석 조건을 제대로 지키지 않은 게 드러나면 보석이 취소되고 10억원의 보증금도 몰수된다.
 
박병규 변호사(법무법인 이로)는 “말만 보석이지 가택연금(거주지에 감금 형벌)과 비슷한 수준”이라면서도 “보석 자체가 일반 피고인들에게는 꿈꾸기 어려운 선처라 불만을 가질 거리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은 재판부가 보석 조건을 설명할 동안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했다. 재판이 10분 휴정한 사이 변호인과 상의한 그는 “(보석 조건을) 숙지했다”며 동의 의사를 밝혔다. 재판부가 “이행할 수 있겠느냐”고 거듭 묻자 “구속 전부터 오해 소지가 있는 일은 하지도 않았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며 자신감을 보이기도 했다.
 
이 전 대통령 측 강훈 변호사는 재판 직후 기자들과 만나 “제가 변호사를 하면서 (본 것 중) 보석 조건이 가장 많았다”며 조건이 다소 가혹하다는 의사를 내비쳤다. 강 변호사에 따르면 이 전 대통령도 “그냥 구치소에 있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의견을 구했고, 특히 보석 보증금 10억원을 두고선 “(재판부가) 나를 증거 인멸할 우려가 있는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인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보석 허가 뒤 서울 동부구치소로 돌아간 이 전 대통령은 오후 3시46분쯤 구치소 정문을 나섰다.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 양복 차림으로 나온 그는 대기하고 있던 검은색 제네시스 차량에 곧바로 탑승했다.  
 
이 전 대통령의 석방 소식을 들은 검찰 측은 아무 반응을 내놓지 않았다. 검찰 관계자는 “그동안 법정에서 보석에 반대하는 의견을 충분히 개진했다. 지금 추가로 말할 입장은 없다”고만 짧게 밝혔다.
 
박사라·백희연 기자 park.sara@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