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죄 폐지’ 아일랜드 '시민의회'가 한국에 주는 메시지

중앙일보

입력 2019.02.24 08:30

수정 2019.02.28 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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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더블린에 모인 낙태 금지 폐지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국민투표 통과 소식을 듣고 기뻐하고 있다. [AP=연합뉴스]

66.4%. 지난해 5월 25일(현지시간) 낙태를 전면 금지하는 수정헌법 8조를 개정하는 데 찬성한 아일랜드 유권자의 비율이다.
 
시민들은 낙태 시술을 받은 여성에게 최장 14년의 징역을 부과할 수 있게 한 조항을 투표를 통해 폐지했다. 올해 1월 바뀐 법이 적용돼 임신 12주까지 여성 요청이 있으면 낙태 시술을 할 수 있고, 그 이후에는 여성의 생명에 위험이 있을 때나 태아에 심각한장애가 있으면 낙태가 가능하다.
 
가톨릭 신자가 88%인 아일랜드의 낙태죄 폐지는 전 세계적으로 화제가 됐다. 가톨릭 생명윤리에 따르면, 인간 생명은 난자와 정자가 수정된 순간부터 시작된다. 태아를 생명으로 보는 것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작년 10월 “낙태를 선택하는 여성은 문제 해결을 위해 청부살해업자를 고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낙태 행위를 비판했다.
 
그럼에도 아일랜드에서 이 같은 투표 결과가 나온 데는 '시민의회'(Citizens' Assembly)의 역할이 컸다는 게 국제 인권 연구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시민의회는 아일랜드가 앞으로 직면할 문제들에 대해 논의하는 기구로, 대법원 판사인 의장 1명과 지역, 성, 연령,사회적 계층 등에 기초해 추첨으로 뽑은 시민 99명으로 구성된다. 이들이 과반수로 권고안을 채택해 의회에 전달하면 의회는 이에 대한 수용 여부를 밝혀야 한다. 

인터뷰 중인 윌렌츠 담당관 [사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제공]

 
권고안이 수용되고 헌법 개정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선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낙태죄에 대해선 시민의회 구성원 87%가 폐지 의견을 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논란이 첨예했던 낙태죄 폐지 문제가 정리된 것이다. 낙태죄 위헌 여부 결정을 앞둔 헌법재판소만 바라보고 있는 한국과는 그 과정이 다르다.

 
아일랜드에서 낙태죄 폐지 이슈로 10년 이상 활동해 온그레이스 윌렌츠(Grace Wilentz) 국제앰네스티 아일랜드지부 캠페인ㆍ조사담당관은 21일 중앙일보 인터뷰에서 시민의회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시민들이 정치인보다 더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면서 정치인들에게 '이렇게 가야한다'는 길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의 초빙으로 방한한 윌렌츠 담당관에게 더 자세한 얘기를 들었다.
 
낙태죄 폐지 이후 아일랜드 사회는 어떤 변화를 겪고 있나
지난 1월 낙태 의료 서비스가 전국단위에서 제공되기 시작했으나, 아직 기간이 얼마 되지 않아 분석할만한 데이터를 갖고 있지 않다. 다만, 아일랜드 사람들에게 이제 낙태는 병원에서 행해지는 수많은 의료 서비스 중 하나일 뿐이다. 지금까지 해오던 병원 진료들과 크게 다르지 않게 진행되고있다.
 
종교나 성별에 따른 사회적 갈등은 없었나
가톨릭 신자인 대다수의 시민들도 낙태죄 폐지에 동의했다. 2015년 ‘낙태에 대한 시각이 종교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때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개인의 도덕적 판단으로 낙태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그것을 타인에게 강제할수는 없다’, ‘종교적 신념을 법에 강제할수는 없다’ 는 의견이 많았다. 성별에 따른 갈등도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지난해 국민 투표에서 남성도 과반 이상이 찬성표를 던졌다. 지난해 국민 투표를 위해 해외에서 귀국한 사람들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인증샷' 릴레이를 이어가 화제가 됐던 #HomeToVote 캠페인에도 사실 여성 뿐 아니라 많은 남성들이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시민 의회’는 어떤 역할을 했나
그동안 아일랜드에서 낙태죄 폐지 논의는 이념적인 찬반 대립으로만 이뤄졌다. 시민 의회는 이 구도를 탈피해 팩트와 국제 인권기준 등에 대해 논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줬다. 이 근거를 통해 시민들이 낙태의 범죄화가 낙태를 제대로 막지 못할 뿐더러 안전하지 못한 낙태를 높힌다는 것을 알게된 것이다. 이런 근거를 토대로 전국적인 논의가 시작됐고, 그 과정에서 실제 낙태를 경험했던 여성들의 얘기가 전달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변화의 필요성을 느꼈다. 시민 의회는 낙태를 했던 여성ㆍ낙태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법 때문에 낙태를 거부당한 여성들의 다양한 경험을 들었다.

윌렌츠 담당관이 국제앰네스티 아일랜드 지부에서 발간한 낙태 관련 보고서 'She is not a criminal'을 들고 있는 모습. [사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제공]

한국 사회에서는 아직 낙태에 대한 '낙인찍기'가 강하다. 아일랜드는 어땠나
아일랜드 여성들도 자신의 경험을 입밖으로 꺼내기 시작했을 때 상당한 어려움 있었다. 임신한 여성들이 다른 나라에 가서 낙태 시술을 받아야하는 상황, 아일랜드 안에서 불법적으로 낙태해야하는 상황에 대해 얘기하니까 낙태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이 목소리를 억누르려고하는 반작용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낙인에 굴하지 않고 주변 사람들이나 언론에 자신의 경험을 용기있게 얘기한 여성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변화가 가능했다. 아일랜드 시민들에게 ‘지난해 낙태를 금지하는 헌법이 폐지된게 어떻게 가능했냐’고 물으면 대부분 ‘개인의 경험을 용기있게 얘기했던 여성들 덕분’이라고 대답할거다. 그들의 목소리 덕분에 이 이슈가 추상적이고 도덕적인 논쟁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다. 자신의 경험을 얘기하는 여성들이 많아지면서 이 문제가 실질적으로 친구ㆍ 딸ㆍ동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시급한 문제라는 인식이 생겼고 결국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다.
 
윌렌츠 담당관은 22일 최영애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과 황희석 법무부 인권국장을 만나 낙태죄 폐지 이후 아일랜드에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권유진 기자 kwen.yuj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