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분수대] 박근혜의 적

중앙일보

입력 2019.02.14 00:21

SNS로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

지극히 이성적인 지인이 있다. 미소를 두고 얼굴 근육 10여 개의 경련 현상일 뿐이라고 해석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런 그가 타인의 미소에 탄복하는 걸 봤다. 자신들이 큰 실수를 했음에도 상대가 이해한다는 듯 지었다는 표정을 두고서다. 이런 말도 들었다고 했다. “아휴, 얼마나 놀라셨어요?” 그때 깨달았다. 누구에게나 감성은 있었다.  
 
이토록 내밀한 면모를 드러내 보이도록 한 이가 바로 대선후보 시절의 박근혜 전 대통령이었다. 실상에선 대단히 까다로운 성품의 소유자였지만 적어도 당시엔 추호의 짜증도 내비치지 않았다고 한다. 2006년 5월 유세 중 피습을 당했을 때 부랴부랴 병원을 찾은 유정복 당시 비서실장에게 “많이 놀라셨죠”라고 위로의 말을 건넨 것과 유사한 사례이겠다.
 
“경선 과정의 모든 일들, 이제 잊어버립시다. 하루아침에 잊을 수 없다면 며칠, 몇 날이 걸려서라도 잊읍시다.” 2007년 한나라당 경선 승복 연설이다. 돌이켜보면 박 전 대통령은 잊지 않았고 두고두고 ‘결제’했다. 하지만 연설 덕분에 경선 불복이란 한국 정치의 고질병은 사라졌다. 리더십이 민주적인 건 아니었으나 행동을 통해 민주주의를 진전시키긴 했다.
 
누군가 “박 전 대통령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가”라고 반문할 것이다. 선친(박정희)의 음덕이 그리 강했던 것이냐고 말이다. 하지만 분명히 박 전 대통령 스스로 빛을 내던 순간이 있긴 했다.  덧없는 기억을 거론한 건 최근 박 전 대통령과 몇몇 측근들이 보인 모습 때문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국민, 좁게는 대선 때의 지지자들을 ‘배신’한 건 자신들인데, 자신들을 ‘배신했다’며 남들을 타박하고 있어서다. 왜 탄핵에까지 이르렀는지 새삼 사유들이 떠오른다. 여전히 ‘박근혜’를 내세울 뿐, “사회적 맥락이 없고, 과정도 없이 추대된 지도자”(윤여준)가 길게 드리운 암흑이다.


얼마 전, 박근혜 청와대에서 일했다가 처벌됐던 한 정치권 인사와 나눈 대화다. 문재인 대통령이 보수 진영의 분열을 노려 내년 총선 전에 박 전 대통령을 사면할 것이란 세간의 추측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못할 것이다. 박 전 대통령이 나오면 문재인 정부도 감당을 못할 것이다.” 현 정부를 비판할 것이란 전제였다. “박 전 대통령이 현 정부 못지않게 자신을 배신했다고 여기는 이들을 비난할 수 있다. 이전에도 종종 그랬다”고 하자 그는 반박하지 못했다. 대신 한결 잦아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보수의 자멸이겠지….” 망하는 게 보수만이겠는가.
 
고정애 탐사보도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