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각한 얘기를 유쾌하게 풀어간 ‘말모이’에서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표준어를 정하는 공청회 대목에 등장하는 ‘엉덩이’와 ‘궁둥이’의 차이점이다. 일자무식 까막눈에서 우리말에 서서히 눈을 떠나는 판수(유해진)의 익살스런 모습과 함께 두 단어가 신체의 다른 부위를 가리킨다는 사실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또 한번 고백하건대 영화를 보기 전까지 그 둘을 구분하지 못했다. 궁둥이를 엉덩이의 사투리 정도로 알았다.
3·1운동 100년을 앞두고 돌아보는 첫 우리말 사전
이념·진영에 갈라진 오늘의 우리를 비춰보는 거울
엄 감독은 또 다른 일화도 소개했다. “당시 신문을 보면 ‘강아지’와 ‘개새끼’ 둘 가운데 어느 것을 표준어로 정할 것인지 거수 표결하는 모습도 나온다. 차마 그 장면은 영화에 쓸 수 없었다”고 했다. 이씨 성을 가진 위원 중 한 명이 어느 편에 손을 들었는지 아리송하자 진행자가 “이 선생은 강아지지요”라고 물었는데, 그가 “나는 개새끼입니다”고 답하자 폭소가 터졌다고 한다.
우리 말글을 맘 놓고 쓸 수 없던 시절, 표준어 선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원광대 최경봉 교수가 쓴 『우리말의 탄생』에 그 과정이 자세히 나와 있다. 영화와 달리 공청회는 심야극장에서 열리지 않았다. 조선어학회는 표준어 사정(査定)을 위한 위원회를 따로 구성했다. 1933년 1월 충남 아산 온정리에서, 그해 8월 서울 우이동 봉황각에서, 3년 뒤 7월 인천 제1공립보통학교에서, 총 세 차례 회의가 열렸다.
흥미로운 건 위원회 구성이다. 위원 73명 가운데 37명은 서울·경기, 나머지 36명은 인구수 비례에 따라 다른 도 출신에서 뽑았다. 표준어가 서울말을 근간으로 하지만 다른 지역의 말도 무시하지 않았다. 서울·경기 위원들이 결정권을 갖되 다른 지방에서 이의를 제기하면 반드시 이를 재심리에 부쳤다. 독회가 끝난 원안 또한 교육·언론·종교기관 439곳에 보내 검토를 받았다. 이어 1936년 10월 서울 인사동에서 열린 훈민정음 반포 490년 축하회에서 총 6111개의 표준어를 확정했다. 민의를 최대한 반영하려는, 절차적 합리성을 최대한 확보하려는 노력이 눈에 띈다.
사전 발간까지는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많은 학자들이 옥고를 치렀고, 해방 직후인 1945년 9월 8일 그간 사라진 것으로 알려진 사전 원고 뭉치 2만6500여장이 서울역 창고에서 기적적으로 발견됐다. 그리고 1947년 ‘조선말 큰사전’ 1권이 드디어 얼굴을 드러냈다. 1929년 조선어사전편찬회의가 발족한 지 18년 만이다. ‘큰사전’ 전체 6권이 마무리된 건 57년이니, 이를 기준으로 하면 총 28년이 걸린 셈이다.
‘조선말 큰사전’은 3·1운동의 또 다른 결실이다. 100년 전 나라 독립을 향한 외침이 1921년 조선어학회 창립으로 이어졌다. 국어사전이란 대명제 앞에서 민족주의자·사회주의자가 한데 뭉쳤다. 이념·진영의 구분이 없었다. 이런 공감은 해방공간까지도 살아 있었다. 조선어학회는 1946년 12월 혼돈의 정국에서 “좌우 양익의 합작으로 통일국가 건설에 힘을 같이하자”라는 성명을 냈다. 최경봉 교수는 “해방 전후 전 민족적 지지를 받는 대중조직은 조선어학회가 거의 유일했다”고 평가했다. 이후 국어사전도 남북이 따로 내는 분단의 수렁에 빠졌지만 오늘 다시 돌아보는 ‘조선말 큰사전’은 새롭기만 하다. 통일에 대한 비전은 둘째 치고 좌파니 우파니, 진보니 보수니 하는 부질없는 말싸움에 연일 엉덩방아를 찧고 있는 게 우리의 모습 아닌가.
박정호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