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도화선 된 2·8 독립선언
최팔용·서춘·백관수·이광수 등 11명이 실행위원이 됐다. 소설가로 이름을 날렸지만, 후에 친일파로 변절한 이광수가 선언문을 기초했다.
당시 조선보다 일본에서는 오히려 경찰의 감시에서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또한 도쿄가 한성보다 외국 소식을 접하기 쉬웠기에 세계적인 민족 자결주의의 흐름도 유학생들이 먼저 파악할 수 있었다.
“조선청년독립단은 우리 2000만 민족을 대표하여 정의와 자유를 쟁취한 세계 모든 나라 앞에 독립을 성취할 것을 선언하노라.”
선언식이 끝날 무렵 일본 경찰이 대회장으로 난입했다. 당시 외무성이 발간한 ‘재경조선인 최근 상황’에 따르면 현장에서 유학생 27명이 체포됐다.
2019년 다시 읽는 2·8 독립선언서
2·8 독립선언은 이후 범민족적 독립 운동인 3·1운동의 불씨를 지폈고, 그해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됐다.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100주년을 맞아 기념사업위원회 등이 출범하며 2·8선언서의 역사적 의의가 재평가되고 있다.
오는 8일 오전 11시 서울 YMCA와 일본 도쿄 재일본한국YMCA에서 2·8독립선언을 기념하는 행사가 동시에 개최된다. 도쿄 현지 기념식에는 피우진 보훈처장 등 250여 명이 참석한다. 서울 종로YMCA에는 기념식과 함께 2·8독립선언의 역사적 의의에 대해 살펴보는 강연도 진행된다. 강연은 이덕주 전 감신대 교수(서울 YMCA 시민논단위원)가 진행한다.
이 교수는 “2·8독립선언서는 민족문제를 안고 있는 이 시대 청년들에게 훌륭한 역사교재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선언서에 가장 많이 나온 단어는 민족 45회, 일본 36회, 한국 33회다. 10회 이상 반복된 단어는 독립 14회, 자유 13회, 평화 11회였다. 불행한 현실에서 과거 역사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현실을 진단하고 행복한 미래를 내다본 것을 엿볼 수 있다.
이 교수는 “당시 청년들은 일제 식민통치하라는 불행한 현실을 타파한 후 민족의 진정한 행복이 성취될 미래를 꿈꾸었다”며 “하지만 해방 후 전쟁을 겪고 분단 상황이 지속되는 지금까지도 당시 청년들이 꿈꾸던 미래는 아직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고 말했다.
박해리 기자 park.hae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