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진영의 산증인이라는 이재영 전 진보신당 정책위원장도 타계 전 인터뷰에서 똑같이 증언했다. “원래 민주노총에 주사파는 없었다. 초기 주류였던 중앙파는 PD(민중민주) 학생운동권에서 인력을 수혈받았으나 현장 중심의 국민파는 NL 학출(대학 출신 노동운동가)들을 하위 파트너로 삼았다. 그런데 순식간에 관계가 역전됐다. 경기동부 등이 산별노조 대신 일반 노조에 침투해 지분을 급속히 늘리면서 국민파를 압도했다.”
마르크스도 경계한 좌파 교조주의
민주노총과 참여연대에 포위돼
자칫 좌파 근본주의에 전염되면
나라 전체가 함정에 빠지게 된다
이렇게 주변이 변했는데도 문 대통령은 소득주도 성장을 고집하고 있다. 촛불에 대한 부채에다 지지기반인 민주노총과 참여연대를 의식하는 눈치다. 덩달아 새 청와대 참모진도 근본 처방 대신 대증요법만 내놓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토건 사업 부활이다. 어제는 24조원 규모의 토건 사업을 예비타당성(예타) 조사까지 면제하며 밀어붙였다. 이명박 정부는 그나마 4대강 사업의 예타를 피하기 위해 구간을 쪼개는 예의라도 보였다. 이번에는 그런 염치조차 없는 포퓰리즘의 극치다.
더 걱정스러운 것은 올해다. 지난 연말부터 반도체 수퍼 호황이 곤두박질하고 수출·투자가 쪼그라들고 있다. 미국은 순환적 침체에 진입하고 중국 경제는 구조적 위험에 노출됐다. 올해 우리 성장률은 2%대 중반을 장담하기도 쉽지 않다. 이렇게 하방 리스크가 커진 국면에서 소득주도 성장이나 부동산 보유세 강화 같은 설익은 실험은 위험한 선택이다. 훨씬 심각한 부작용을 각오해야 한다.
소득주도 성장은 이미 실패한 정책으로 낙인 찍혔다. 이인실 차기 한국 경제학회장은 “요즘 말도 안 되는 경제정책에 왜 경제학자들이 비난 성명을 안 내느냐는 항의 전화가 쏟아진다”고 전했다. 해외에서도 비판 일색이다. “위험한 모델”(노벨상의 폴 로머 교수)· “명백히 나쁜 아이디어”(하버드대 로버트 배로 교수)·“멍청한 이론”(아서 래퍼 교수)…. 뉴욕타임스는 “정책 성과가 매우 실망스럽다”고 보도했고 파이낸셜 타임스도 “새 모델로 갈아타지 않으면 장기 불황에 접어들 것”이라 경고했다.
선진국들 중 유독 한국만 거꾸로 가고 있다. 소득주도 성장으로 계속 경제의 공급부문에 충격을 준다. 그리고는 재정을 퍼부으면서 막연히 참고 기다리면 좋아질 것이란 주문만 외운다. 타계한 진보 경제학자 김기원 교수는 『한국의 진보를 비판한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땅의 진보는 현실의 모순을 지적하는 데 선수지만 바람직한 사회를 만드는 능력에는 소홀했다. 내공을 키워야 한다.” 더 이상의 무모한 생체실험은 후유증만 키울 뿐이다. 슘페터도 “마차를 이어붙인다고 기차가 되는 게 아니다”고 했다.
좌파는 조금만 타협해도 배신자로 낙인찍는 순혈주의가 문제다. 순수한 유토피아에 집착해 유연한 선택을 외면하기 일쑤다. 마르크스는 이런 좌파 교조주의를 헤겔과 희랍 우화를 들어 풍자했다. “이곳이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 문재인 정부도 나빠져 가는 경제 현실을 살펴 과감한 정책 전환에 나서야 할 것이다. 자칫 NL이 주축인 민주노총과 참여연대 등에 포위돼 좌파 근본주의에 전염되면 나라 전체가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이철호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