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선2035

[시선2035]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중앙일보

입력 2019.01.23 0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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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경원 대중문화팀 기자

JTBC 금토극 ‘SKY 캐슬’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은 누굴까. 처음엔 김혜나(김보라)라고 생각했다. 유일한 피붙이인 엄마는 일찌감치 죽고, 뒤늦게 알게 된 아빠란 인간은 권력에 눈이 멀어 마지막 순간까지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쓴 황우주(찬희)나 서울대 의대 진학을 코앞에 두고 꺾인 강예서(김혜윤) 등 불쌍한 사람 천지였다.
 
하지만 윤 여사(정애리)가 강준상(정준호)을 향해 “너 병원에 사표 낼 거면 날 죽이고 내”라고 외치는 순간 확신했다. 오십 평생을 엄마의 바람을 충족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아들의 삶도 안쓰러웠지만, 아들의 성공이 곧 존재의 이유인 엄마라니. 연민을 넘어 충격과 공포다. 자녀와 자신을 인격적으로 분리하지 못할뿐더러 철저히 일체화하고 있을 때만 나올 수 있는 말이다.
 
등장인물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두 자녀와 완벽히 분리되지 못했다. 한서진(염정아)이 딸의 성과를 두고 “우리가 함께 만들어 온 것들”이라고 말하는 것도, 김주영(김서형)이 입시 코디로 활동하며 잘난 아이를 둔 가정을 파괴하는 것도 자신의 노력 혹은 상실에 대한 보상심리가 발현된 행동이다. 이들의 삶에서 조금이라도 자신으로서 존재할 여지가 있었더라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말은 그래서 아프다. 자식을 통한 대리만족에 올인하는 대신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조금만 더 돌봤더라면, 타인의 시선에서 조금만 더 자유로울 수 있었더라면 훨씬 더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사람은 친구·연인·부부는 물론 회사와 동료를 향해서도 비슷한 말을 쏟아낼 것이다.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데” “내가 얼마나 희생했는데” 등등. 자존감의 빈 자리를 다른 것으로 채우려 하면 할수록 그 구멍이 더 커질 뿐이다.


극 중 강준상은 “주남대 의사가 아니더라도 그냥 엄마 아들이면 안돼요?”라고 묻는다. 안 된다. 엄마와는 별개로 ‘그냥 강준상’이어야 한다. ‘그냥 차세리’로는 만족 못 하는 아빠에게 독립해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 나서는 세리(박유나)처럼, “우리 엄마는 날 있는 그대로 사랑해줬어요”라고 말할 수 있는 혜나처럼 말이다.
 
15살이 됐든, 51살이 됐든 홀로서기가 필요한 시점은 반드시 온다. 그렇다면 하루라도 빨리 연습하는 편이 낫지 않을까. 하루라도 더 제대로 된 자신의 인생을 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그래야 ‘SKY 캐슬’은 비극으로 끝나도 우리 삶은 희극이 될 수 있다.
 
민경원 대중문화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