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실제의 적이 아니라 ‘발명’된 적이다. 발명된 적은 우리의 생존을 ‘위협’하는 적이 아니라 단지 ‘차이’의 존재들일 뿐이다. 차이가 용납되지 않을 때 적이 창조된다. 타자를 악마화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는 주체들은 대부분 빈약한 정체성의 소유자들인 경우가 많다. 몰락하는 이념의 소유자들일수록 새로운 가치를 적대시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차이가 적인 사회에 ‘출구’는 더디 오거나 없고
있지도 않은 적을 생산할 때 세계는 지옥이 된다
이런 식의 적 만들기는 사실상 일상사이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차이의 타자들을 견디지 못하고 적들을 만들어내며 배제한다. 적 발명하기가 공공 영역에서 발생할 때 문제는 더 커진다. 공공 행위는 국가 단위에서 벌어지므로 그 규모와 여파가 방대하다. 자기 집단의 생존을 위하여 다른 집단을 적으로 만들 때 국가 단위의 엄청난 에너지가 소진된다.
특히 정치가 정당성 논쟁이 아니라 적 만들기 싸움으로 흘러갈 때 생기는 모든 문제는 고스란히 국가 구성원 전체의 몫으로 돌아간다. 한국 사회를 오래 지배해온 적성(敵性)은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형성되어왔다. 수많은 정권들이 이념을 내밀며 정체성을 세웠고 타자들을 적화(敵化)해왔으며, 지금도 이런 방식의 싸움은 색깔론의 이름으로 지속되고 있다. 그러는 동안 세기는 바뀌었고, 이념을 버린 세계는 전 지구적 자본의 지배 속으로 들어갔다. 차이가 적이며, 타자가 환멸의 존재인 사회에 ‘출구’는 더디 오거나 없다. 정치가 할 일은 차이를 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있지도 않은 적의 본질을 타자에게 부여하고 적을 생산할 때, 세계는 지옥이 된다.
에코는 “적 발명하기”라는 글의 마지막을 사르트르의 단막극 『출구 없는 방』에 대한 언급으로 끝낸다. 이 작품에는 창문도 거울도 없이 밀폐된 방에 갇힌 세 명의 죽은 자들이 등장한다. 이 방 안에는 고문하는 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끊임없이 고문을 당하고 있다고 느낀다. 이들은 거울 대신에 타자의 얼굴을 보며 서로를 증오한다. 한 등장인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 모두는 다른 두 사람을 고문하는 자로 행동할 거야.” 타자의 ‘존재’ 그 자체가 이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지옥이었던 것이다.
오민석 문학평론가·단국대 교수 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