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북·미 2차 정상회담과 김정은 연내 답방 등 적과의 오랜 대결을 해소할 호기가 다가왔다. 미·소 냉전 해체와 독일 통일 이후 서방사회의 변화상을 사회학자 울리히 베크는 주목했다. “공동의 적이 사라지면 내부의 강한 연대감이 소멸되면서 새로운 적을 찾아나서기 마련”(『적이 사라진 민주주의』)이라는 결론이었다. 내부의 정파·계층·세대간 갈등은 확연해지고, ‘잃어버린 적’에의 향수는 대체된 적에 대한 증오로 옮겨 간다는 분석이었다.
북한과의 냉전 해빙 기류 속
내부 갈등과 증오 커져만 가
한반도 평화 이루어 내려면
대통령이 보수·의회·우방과
포용, 화해로 에너지 모아야
맞은편 동독에서는 역으로 데탕트를 거부하던 기득권 수장인 울브리히트 사회주의통일당 제1서기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다. 호네커 등의 당 정치국원들은 해빙의 장애물인 울브리히트를 쫓아내자고 브레즈네프 소련 서기장에게 고자질했다. 당시 78세이던 울브리히트의 건강까지 트집잡았다. 하루 4시간만 업무를 하고 수·토·일요일은 집에서 쉬라는 내부 쿠데타 끝에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이슬람과의 역사적 화해를 추구했던 오바마 미 대통령 역시 “케냐 출신 이슬람 교도의 반미”라는 버서(birther·대통령 출생지 자격) 논쟁에 휩싸였다. 최초의 흑인 대통령에 고조됐던 ‘인종 갈등 해소’의 기대는 역주행을 거듭해 지금 ‘반(反)이민’의 굳건한 국경장벽에 막혀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일제(日帝)라는 적이 사라지자 분출했던 좌·우익, 지주-소작농, 친일 청산 갈등의 우리 해방 직후 역사는 어떠한가.
보수와의 소통과 포용에 대통령이 나서야 한다. 다행히도 공통분모가 있다. 북한 체제와는 화해 없다는 강고한 국가 보수주의자들과 달리 평화와 경제적 기회를 중시하는 시장 보수주의자들이 있다. 북한으로의 길이 철도·SOC·전력·플랜트·관광·IT·농림의 신천지로 이끌어주리란 비전을 시장·기업과 공유해야 한다. 누가 알랴. 그들이 최고의 원군(援軍)이 될는지.
정치 역시 화해의 대상이다. 문 대통령에겐 늘 ‘자기 존재의 구속’이란 한계가 느껴져 왔다. 학생운동과 인권변호사를 거치며 ‘원칙’은 때론 ‘멍에’의 동어반복이 돼 왔다. 민정수석 시절, 감춰진 그들의 욕망을 들춰 보며 ‘정치’ ‘정치인’에 대한 거부감은 더욱 고착됐으리라. 하지만 또다른 선출 권력과의 연대 없이 어떤 대업을 기대하겠는가. 집권 후반일수록 충직했던 관료들은 대통령의 손아귀를 벗어날 뿐이다. 조약 비준 등 숱한 고비를 넘기려면 여야 의회와의 협치(協治)는 필수다. 차라리 외교·통일장관, 대북 특사 등 해빙의 주역들을 보수나 중도, 야권에 맡겨 보는 연정(聯政)식 발상은 왜 못해 보겠는가. 독일 사민당은 연정 파트너인 중도의 자유민주당 총재를 지낸 겐셔에게 16년 동안 외상을 맡겨 통일 험로를 함께 닦아나갔다.
공동의 적이 사라지는 즈음 묘해지는 건 우방과의 관계다. 동맹 간의 우정이 민족국가 간의 냉정한 실리로 대체되기 십상이다. 미국과의 방위분담금, 일본과의 레이더 조준 파열음이 벌써 들려온다. 등 뒤를 우방에 포위당하는 형국은 곤란하다. 한반도의 평화를 영구적인 동북아 차원으로 이어가려면 밉더라도 일본과는 화해의 물꼬를 터야 한다.
큰 일 나설 문 대통령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정쟁과 ‘업(業)’의 속박에서 벗어나 ‘소소한 적’들을 보듬어 가는 대승(大乘)적 평정이다. 신재민·김태우를 감싸안지 못할 이유가 그리 큰 건가. 이슬람권인 카이로대를 찾은 오바마는 연설 ‘새로운 시작’에서 포용을 이렇게 해석했다. “통치자는 강압 아닌 동의를 통해 권력을 유지해야 합니다. 바로 관용·타협의 정신입니다. 모든 종교의 원칙은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최훈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