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안혜리 논설위원이 간다] 근무시간에 직원들 놀고 먹는데 1조기업 만든 창업주의 소신

중앙일보

입력 2019.01.15 00:01

수정 2019.01.15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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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돈 걱정 없이 하루 2~3시간만 집중하라" 
직원에 화끈한 복지 혜택 주고 급성장 중인 유니콘 기업을 가다 
비단 정보기술(IT)기업이 아니더라도 무(無)에서 시작해 절박하게 일하는 스타트업 특성상 저임금의 장시간 노동과 높은 업무강도는 당연시돼 왔다. 그런데 2018년말 현재 한국에 단 여섯 개밖에 없는 유니콘 기업(기업가치 10억 달러가 넘는 비상장 스타트업) 중 하나인 이 회사는 좀 다르다. 평일 오전 9시 근무를 시작해 오후 6시면 임원부터 말단 직원까지 모두 칼퇴근하는 건 기본, 주말에 일 하러 회사 나올 일은 없다. 

엘앤피 사옥 지하2층에 있는 피트니스 센터를 가면 평일 낮에도 이렇게 농구를 하는 직원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근무중이라도 농구는 물론 골프 레슨까지 받을 수 있다. [사진 엘앤피코스메틱]

심지어 근무시간 중이라도 자고 싶으면 자고, 운동하고 싶으면 운동한다. 미리 예약하면 상주하는 정규직 티칭 프로에게 골프 레슨도 받을 수 있다. 이쯤되면 밖에서 보기엔 놀고 먹는 수준인데 이렇게 알아서 일하고 알아서 쉴 자유를 직원들에게 줬더니 망하기는커녕. 직원 3명에 자본금 5000만원으로 시작한 회사가 10년만에 직원 250명에 기업가치 1조원이 훌쩍 넘는 회사로 성장했다. '메디힐'이라는 브랜드로 마스크팩을 14억 장이나 팔아치운 엘앤피코스메틱(이하 엘앤피) 얘기다.  

엘앤피는 한해 4조 원 넘는 경제효과를 창출한다는 보이그룹 BTS와 협업해 마스크팩 제품을 내놓았다. BTS 지민 등 멤버들이 직접 제품을 SNS에 노출하면서 글로벌한 인지도를 얻었다. [사진 엘엔피 코스메틱]

이렇게 많은 마스크팩을 팔았어도 엘앤피라는 회사 이름은 여전히 낯설다. 진작 유니콘 기업에 이름을 올린 소셜커머스업체 쿠팡(2015)과 옐로모바일(2014), 그리고 지난해 합류한 토스(송금앱)나 우아한형제들(배달앱 배달의민족) 등 다른 유니콘 기업과 비교하면 분명 대중적 인지도가 떨어진다. 화장품업계로 범위를 좁혀도 마찬가지다. 전통적 강자인 아모레퍼시픽과 LG생활건강은 물론 자체 브랜드가 없는 화장품 제조자개발생산(ODM) 업체인 한국콜마와 코스맥스에 비해서도 생소하기 그지없다. 그런데도 레전드 캐피탈이나 크레디트스위스같은 중국과 유럽의 글로벌 투자회사들은 혁신 IT기술 하나 없이 그저 열심히 마스크팩을 파는 이 무명의 화장품 회사에 서슴없이 수백 억원씩을 투자했다. 그리고 최근 몇년새 삼성과 로레알 등 글로벌 기업 출신 C레벨(최고 관리자) 인재들이 속속 합류했다. 지금 전 세계에서 가장 핫한 보이그룹인 방탄소년단(BTS)과도 컬래버레이션해 제품을 내놓기도 했다.  

엘앤피 권오섭 회장(왼쪽)은 2016년 120억원을 비롯 고려대에 140억원을 기증했다. [사진 고려대]

2013년부터 5년 동안 연평균 142.7%나 무섭게 성장하면서 2016년엔 고려대에 120억원을 한 번에 현찰로 기부했다. 한국기업이 LPGA 대회 타이틀 스폰서를 맡은 대회는 기아클래식과 롯데챔피언십 등 4개에 불과한데 엘앤피가 그 중 하나를 갖고 있다. 대체 어떤 회사이길래 이름도 제대로 알리기 전에 이런 급성장을 했을까. 그 비결이 궁금해 서울 강서구에 있는 사옥에 직접 가봤다.  

지난해 유니콘 기업 오른 엘앤피
국내 6곳 중 유일한 화장품 회사
BTS 컬래버·인재영입·기부로 화제
판매사원에 티칭 프로까지 정규직
"회장 아들 입사시켜 미안하다"
장기근속직원 '자녀 입사' 제도화

 
 
지하철 9호선 등촌역에 인접한 지하 3층 지상 8층짜리 엘앤피 사옥을 처음 찾은 건 평일인 화요일 오후 2시쯤이었다. 회사 구경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지난해말 로레알에서 합류한 이선주 대표(글로벌전략총괄)가 대뜸 지하 2층부터 안내를 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무려 737㎡(223평)에 달하는 직원용 피트니스센터가 펼쳐져 있는 것도 다른 회사에선 보기 어려운 장관이었지만 더 놀라운 건 그 시간에 운동하는 직원들 모습이었다. 

네 자리가 마련된 골프연습 타석엔 직원 두 명이 티칭 프로 레슨을 받으며 골프 연습을 하고 있었다. 맞은편, 특급호텔 피트니스클럽에서나 사용함직한 최고 사양의 웨이트 기구가 놓인 곳에서도 한 직원이 PT수업을 받고 있었다. 구석구석 돌아보니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스크린 골프에 대형 자쿠지가 갖춰진 사우나실, 수면실, 물리치료실, 농구대까지…. 이 대표는 "임원뿐 아니라 일반 평직원들까지 아무 때나 윗사람 눈치 안 보고 자유롭게 이용한다"며 "그런데도 업무나 회사에 대한 집중도와 로열티가 높아 깜짝 놀랐다"고 말했다. 앞서 제일기획에서 합류한 김유 전무도 "스스로에게 자율권을 주니 누가 시켜서 업무시간 배분을 할 때보다 업무 집중도나 만족도가 더 높다"고 했다.  


사옥 피트니스센터 안엔 스크린 골프까지 있다. 근무 중 PT를 받는 직원. 사우나에 딸린 자쿠지(왼쪽부터). 안혜리 기자

복지 혜택 좋기로 유명한 스타트업도 있고, 정부의 주52시간 근무제 도입 전부터 칼 같이 근로시간을 단축한 대기업도 있다. 하지만 그 회사들은 이런 혜택을 직원들에게 주는 대신 모두 엄격한 규율을 강제한다. 가령 무제한 도서구입비 등 복지혜택 많기로 유명한 우아한형제들은 출근시간에서 단 1분의 지각도 용납하지 않는다. 대기업 가운데 처음으로 월급을 줄이지 않고 주 35시간 근로시간 단축을 감행한 신세계는 하루 두 차례 2시간씩 흡연실 문까지 잠그고 고강도 업무를 독려하는 집중근무시간을 운용한다.  

그런데 엘앤피는 이런 간섭이 전혀 없다. 담배 피우고 싶을 때 옥상 정원에 가서 피우고 커피 마시고 싶으면 1층 사원 카페 가서 마신다. 동료들끼리 업무시간에 농구를 하든, 골프연습을 하든, 피곤해서 잠을 자든 스스로 할 일을 알아서 하고 오후 6시면 모두 칼퇴근한다.  

사옥 2층 쇼룸 한켠에 진열된 수출탑과 표창장. 2014년 300만 달러 수출탑을 처음 받은 이래 매년 큰 폭으로 늘어 2018년엔 1억 달러 수출탑을 달성했다. 안혜리 기자

이런 식으로 회사가 어떻게 굴러갈까 싶지만 실적을 보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2014년 300만 달러 수출탑을 시작으로 매년 더 높은 탑을 쌓더니 지난해 1억 달러 수출탑을 챙겼다. 그 사이 일자리 창출로 대통령 표창을 두 번이나 받았다. 그도 그럴 것이 비정규직 문제로 온 사회가 몸살을 앓는 와중에도 중국동포 출신 면세점 판매사원부터 사옥 피트니스센터의 물리치료사까지 250명의 직원 모두를 정규직으로 채용했기 때문이다. 전 직원이 우리사주를 받은 것은 물론 연봉 역시 회사 성장과 함께 쑥쑥 올라 업계 최고 수준에 점차 근접해가고 있다.  

엘앤피 사옥에 마련된 물리치료실. 전문 물리치료사가 정규직 직원으로 있어 직원들이 이용할 수 있다. 안혜리 기자

근무중에 일 안 하는 직원은 다 도둑처럼 보일 법도 한데 창업주인 권오섭(60) 회장은 오히려 정반대 이야기를 한다. 그는 "사람은 어차피 하루에 기껏해야 2~3시간밖에 집중해서 일을 못한다"며 "그 시간 동안이라도 아무 걱정없이 일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말했다. 엘앤피의 근무 중 자유로운 운동, 그리고 자녀 학자금 100%와 전세금 지원 같은 복지 혜택은 모두 이런 생각에서 나왔다. 직원들이 건강 걱정 돈 걱정 없이 일에 전념할 수 있는 근무환경을 만들어야 기업도 성장이 가능하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권 회장의 이런 경영철학은 엘앤피 창립 전 두 번의 사업실패가 큰 밑거름이 됐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직전과 금융위기 직전에 각각 창업했다가 그야말로 폭삭 망했지만 그는 "두 번의 실패 덕에 이런 경영철학을 현실과 접목할 수 있는 마음가짐과 노하우가 생겼다"고 했다. 

권 회장도 사업을 시작하던 초기엔 자신감으로 포장한 오만한 마음이 더 큰 평범한 사업가였다. 겸손을 모르고 혼자 잘난 줄만 알았다. 1996년 처음 창업한 화장품 전문점 매장 한 곳에서만 한달에 3억5000만 원 넘게 화장품을 팔아치운 수완 좋은 사업가였으니 말이다. 당시 웬만한 대형유통업체도 엄두를 못내던 POS 시스템(판매시점 정보관리시스템)을 3억 원 들여 자체 개발하는 등 초기 투자비용이 워낙 컸지만 불과 1년만에 1000만원의 흑자를 냈다. 한국이 외환위기로 IMF에 구제금융 지원 요청을 하기 딱 한달 전이었다. IMF외환위기는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그 사이 16곳으로 늘어난 매장은 고스란히 빚으로 돌아왔다. 서울 방배동 부촌에 살면서 벤츠 타고 다니며 아내에게도 통 크게 차 한 대 사줬던 자신만만하던 30대 사업가가 인생에서 맛본 첫 실패였다. 개인자산 11억 원은 순식간에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고 82.5㎡(25평) 전셋집에서 생계를 걱정하는 처지가 됐다.  

권오섭 엘앤피코스메틱 회장. [중앙포토]

우여곡절 끝에 겨우 재기해서 10년만에 두 번째로 창업한 색조화장품회사 역시 자금 압박에 직원들 퇴직금도 못 주고 매각했다. 두 번의 실패를 겪으면서도 권 회장이 지킨 원칙이 하나 있다. 망해도 잘 망해야 한다, 다시 말해 돈은 잃어도 신뢰는 잃지 않는다는 원칙이다. 그는 돈 빌린 사람은 물론 직원 한사람 한사람에게 "지금은 돈(퇴직금)을 못 주지만 나중에 꼭 갚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나중에 정말 이 약속을 지켰다. 이렇게 신뢰를 지킨 사람들은 지금도 투자자로, 또 직원으로 권 회장 곁에 모두 남아 있다.  

신뢰의 힘을 확인한 것만큼이나 이 과정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된 건 그의 아내였다. 남의 화장품회사에서 뛰어난 기획력으로 꽤 큰 돈을 만졌지만 단 한 번도 월급봉투를 집에 갖다 주지 않았다. 버는 족족 빚 갚고 못 준 퇴직금 정산하는 데 다 썼다. 90년대부터 일찌기 자가용 굴리던 화장품사업가 사모님은 불문학 전공을 살려 책 번역하고 번 돈으로 생계를 꾸리는 실질적 가장 역할을 도맡아야 했다. 그런데도 단 한 번 불만을 터뜨린 적이 없다. 그저 늘 "편한 대로 하라"는 말 뿐이었다. 그렇게 두 번의 사업실패를 넘겼다.  

첫 번째 사업 실패 이후 권 회장 아내는 지금까지 차가 없다. 대신 뚜벅이 생활을 즐긴다. 평범한 주부라면 남편 회사가 번듯하게 큰 만큼 지난 세월 고생을 모두 보상받고 싶은 마음이 컸겠지만 회사 차 쓰라는 남편을 오히려 나무랐다. "나를 부끄러운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고 정색했다. 이런 아내가 있어서일까. 권 회장이 스스로에게 한 약속 중 하나가 "절대 가족회사를 만들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2016년 아들이 엘앤피에 입사하면서 이 약속을 어긴 셈이 됐다. 누가 뭐라하는 것도 아닌데 권 회장은 "직원들에게 미안하다"며 형평성을 감안해 오래 근무했거나 회사에 공헌한 직원들에게 한 명씩 해당 직원의 가족을 입사시키는 제도를 만들었다. 지난해 줄곧 문제가 됐던 오너 갑질은커녕 말과 행동이 다르지 않은 오너 앞에서 내 이익만 앞세우는 직원을 찾긴 어렵다. 회사 규모를 넘어서는 글로벌 인재를 끌어들이고 사람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성장을 한 비결이 바로 여기 있었다.  

권오섭 회장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표창장. 수출과 고용으로 사회와 국가에 기여했다는 걸 보여주는 증표라서다. 안혜리 기자

직원에게 자유를 줘서 직원이 행복한 회사를 만들겠다는 엘앤피의 철학은 "직원에게 권한을 줄수록 놀랄 만큼 강력해질 것"이라는 넷플릭스의 원칙과도, "직원이 행복한 회사를 목표로 경영해야 한다"는 교세라의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의 조언과도 맞닿아 있었다. 교과서적으로 기업 하면 망하는 게 아니라 교과서적으로 경영했더니 오히려 기업을 성장시킨다는 걸 엘앤피가 보여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