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령 국민 프로듀서(시청자)들이 투표를 통해 아이돌 멤버를 뽑는 TV 오디션 ‘프로듀스101’은 TV로 들어온 게이미피케이션이다. 게이머가 아버지가 되어 딸을 키우는 ‘육성 시뮬레이션’ 게임인 ‘프린세스 메이커’를 TV 오디션 형식에 차용했다. 그것도 이중 게임이다. 오디션에 나온 아이돌 후보들끼리 경합을 벌이고, 시청자는 자신이 원하는 멤버를 데뷔시키기 위해 경쟁 후보를 견제하는 등 게임처럼 프로를 즐긴다.
증강현실 소재, 쌍방향 스토리
드라마와 영화로 들어온 게임
게이미피케이션 현상도 눈길
중독담론 넘어 비평적 이해 필요
스티븐 스필버그는 가상현실(VR· Virtual Reality) 게임 소재의 블럭버스터 ‘레디 플레이어 원’(2018)으로 세계적인 흥행에 성공했다. 디스토피아적인 미래, 유일한 탈출구인 가상현실 게임 ‘오아시스’에 열광하는 주인공이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다 현실 세계의 악을 물리치는 얘기다. 캐시템(게임 아이템), 워프(순간이동), 상처에서 줄줄이 흐르는 코인 등 게임 요소들을 적절히 배치해 게임 팬들에게 어필하는 한편, 중요한 건 진짜 현실이란 메시지를 담았다. 우리 영화로는 온라인 게임과 액션을 버무린 박광현 감독의 ‘조작된 도시’(2017)가 있다. 초반부 대규모 전투 장면은 온라인 게임 속을 누비는 주인공의 상상 액션이다.
최근 국내외 젊은 관객들 사이에서 폭발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tvN 드라마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과 넷플릭스 영화 ‘블랙 미러:밴더스내치’도 게임이 소재다. 게임을 다루는 훨씬 진화된 방식이 눈길을 끈다.
전작인 TV 드라마 ‘W’에서 웹툰과 현실의 경계를 허물며 국내 판타지물의 새 장을 개척한 송재정 작가의 예측불허 탄탄한 극본이 시종 감탄을 자아낸다. 한국 드라마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가 절로 나온다. 현실과 게임을 오가다 게임 안에 갇히는 설정은 게임에 대한 통제불능, 게임중독에 대한 날카로운 비평으로도 읽힌다. 이미 일상어가 됐지만 크리(치명타), 던전, 퀘스트, 레벨업 등 게임 용어와 방식을 TV 드라마 안에 그대로 담아냈다.
넷플릭스의 야심작 ‘밴더스내치’는 게임의 이야기 방식인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으로 주목받은 세계적 화제작이다. 플레이어의 선택과 피드백에 따라 진행이 바뀌는 게임처럼, 시청자의 선택으로 줄거리가 바뀐다. 줄거리 자체가 게임 개발자의 게임 개발 과정이다. 주인공에게 주어진 크고 작은 선택지는 30여개, 준비된 결말은 5개지만 최종 경우의 수는 그보다 더 많다. 러닝타임도 천차만별, 길게는 5시간에 달한다. 사실 결론이 무엇이냐 보다, 주인공이 자신의 선택이 제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관객 혹은 넷플릭스)의 조작이라는 의심을 품는 대목이 궁극적 메시지다. 관객에게 선택지를 더 많이 열어줬지만 결국은 손바닥 안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미디어와 기술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담은 영화다.
게임 소재로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두 작품의 외피는 게임·기술 비관론이지만, 역설적으로 더 이상 게임이 주변부 문화가 아니라는 것도 보여준다. 정신과 의사 하지현이 책 『게임, 세상을 보는 또 하나의 창』의 추천 글에서 “20세기가 영화의 세기였다면, 이제는 영화에 대한 관심이 조만간 게임으로 옮겨가지 않을까” 했던 전망에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하지현은 이렇게도 썼다. “일반적으로 역사는 승자의 시점에서 쓰인 것이라는 결과 위주의 스토리텔링인데 반해, 게임 속의 역사는 그것을 플레이어들이 만들어가고, 작동방식이나 어떤 인물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는 열린 시스템으로 구성돼 있다. 역사책을 많이 읽은 사람과 ‘문명’ ‘삼국지’ 같은 게임을 많이 해본 사람은 나중에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도 사뭇 다르지 않을까.” 게임과 게이머가 세상을 인식하고 구성하는 방식을 모르고서는 새로운 세상과 문화를 읽기 어려운 시대라는 얘기다.
양성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