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 장관 수명 1년…이벤트는 차관에 맡기고 고등과학원에 올인

중앙일보

입력 2019.01.08 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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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1990년 처음 과학기술처 장관을 맡으면서 배운 깨달음의 하나가 ‘장관 수명은 평균 1년’이라는 것이다. 인사·정책 결정과 실무 집행을 속전속결로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94년 12월 24일 ‘재수생 장관’이 되자마자 즉시 인사를 시작했다. 당시 한이헌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에게 구본영 교통부 차관과 임창렬 조달청장을 과기처 차관으로 추천했으며 26일 구 차관이 발령받았다. 취임 첫 주에 차관보급 3명도 임명했다. 기획관리실장엔 송옥환 청와대 과학기술국장, 연구개발실장엔 국방과학연구소에서 백곰 사업 핵심 간부로 일했던 김정덕 박사, 원자력 실장에는 상공부의 김세종 전력국장을 각각 발탁했다. 주미 대사관 과학관은 박흥일 국장을 지명했다.  

대전 국가핵융합연구소의 한국형 핵융합장치 KSTAR. [프리랜서 김성태]

첫 간부회의에서 나는 “장관으로서 꼭 하고 싶고, 해야 할 일에만 전념하려고 하니 행사성 업무는 가급적 차관과 차관보가 맡아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원하고 실무자들과 함께 추진하려던 업무 가운데 첫째는 고등과학원(KIAS) 설립이었다. 미국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처럼 기초 과학자들이 자유롭게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고등과학원을 서울 홍릉의 과학기술원(KAIST) 옛 교정에 96년 10월 세웠다. 홍릉의 교수아파트·학생기숙사·강의동을 활용해 세계 최고 과학자들과 한국의 최우수 과학자들이 기초 과학 분야에서 마음껏 최첨단 연구에 몰두하도록 지원했다. 가난 탈출을 위한 경제개발을 이끄는 과학기술을 넘어 이제 ‘노벨상에 도전하는 기초과학의 전당’을 만들겠다는 의도도 있었다. 현재 수학부·물리학부·계산과학부를 운영하며 창의적 과제 중심의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프랑스 남부 카다라슈에 건설 중인 ITER(국제핵융합실험로) 현장. 높이 30m, 폭 30m 규모로, 한국과 미국·러시아·일본·중국· 유럽 등 7개국이 건설에 참여하고 있다. [사진 국가핵융합연구소]

둘째는 한국 과학기술자들에게 ‘미래 무한 청정 에너지원’인 핵융합을 연구할 기회를 제공하는 일이다. 95년 12월 ‘국가 핵융합 연구개발 기본계획’을 확정하고 이듬해 1월 핵융합 연구개발 사업단을 발족하면서 이를 시작됐다. 2007년 9월 ‘인공태양’으로 불리는 차세대 초전도 핵융합 연구장치인 케이스타(K-STAR)가 완공되고 국가 핵융합연구소(NFRI)가 설립돼 본격적인 연구를 펼치고 있다. 현재 프랑스 남부 카다라슈에 짓는 국제핵융합실험로(ITER) 건설을 한국 과학기술자들이 이끄는 것은 이런 투자가 밑거름이 됐다. 
셋째는 항공우주 종합계획 수립이다. 이를 통해 우리 손으로 우주정거장을 만들고 첨단 과학기술 연구를 수행할 뿐 아니라 유도탄 방어망을 구축해 북한 핵무기나 미사일을 쓸모없는 쇳덩어리로 전락시키고 싶었다. 나는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 의장 시절부터 북한의 핵무장 계획을 퇴치하려면 핵무기를 무력화하거나 사용할 수 없도록 방어체제를 구축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과학기술을 활용해 평화를 지키는 일이다. 

1994년 12월 28일 서울 탑골공원과 주변에서 열렸던 굴업도 핵폐기장 반대 가두행진 모습.[중앙포토]

나는 90년 장관에서 물러났던 원인인 핵폐기장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했다. 당시 핵폐기장 부지로 선정돼 있던 인천 앞바다 굴업도를 취임하고 한주가 갓 지난 95년 1월 1일 방문했다. 바다는 잔잔했지만 거친 업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황수연 기자 ciimccp@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