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7일 연해주의 한인들은 1910년 일제의 국권 강탈 이후 최초의 임시정부(대한국민의회)를 연해주에 세웠다. 당시 연해주에 살던 한인들은 누구였나. 구한말 1860년대부터 학정과 굶주림을 피해 목숨을 걸고 두만강을 건넌 동포들이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외교권을 빼앗기고, 1907년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되고 고종까지 폐위되자 항일의병이 대거 두만강을 건넜다. 의병들은 먼저 이주한 한인들과 손잡고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최재형, 아홉 살 때 러시아로 이주
선원 출발, 큰 돈 모아 의병 길러내
1919년 3월 대한국민의회 발족
꺼져 가던 조선의 망명정부 꿈꿔
안중근의 혼 담긴 ‘단지동맹비’
발해의 옛 땅 크라스키노에 우뚝
“여러분들이 지금 달리는 이 길은 바로 독립운동가 최재형(1860~1920) 선생이 한인들과 함께 만들었습니다. 제정 러시아 니콜라이 2세 차르로부터 첫 은급 훈장도 받았습니다. 100주년을 맞아 임시정부 재무총장(재무부 장관에 해당)이었던 최재형 선생은 꼭 알아야 할 분입니다.”
최재형이 누구인가. 노비의 아들로 아홉 살에 두만강을 건너 6년 동안 러시아 상선을 타고 세계를 두 번이나 돌아본 한국인이다. 유창한 러시아어로 한인들을 도와 ‘페치카(벽난로)’란 애칭으로 불렸던 그의 삶은 영웅담과도 비슷하다.
러일전쟁(1904~1905) 이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발하려던 고종의 밀사 이상설(1870~1917) 선생과 이준(1859~1907) 열사도 이 땅을 거쳐서 갔다. 1907년 해외로 망명한 ‘대한제국 의군 참모 중장’ 안중근(1879~1910) 의사가 최재형 선생을 운명적으로 만난 곳도 여기였다. 최재형과 국내진공작전을 감행했던 안중근은 인심결합론을 외쳤다. “합하면 이루고 흩어지면 패한다. 이는 만고의 진리다(合成散敗萬古眞理).”
최재형 선생이 간도 관리사 이범윤, 러시아 공사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 안중근과 함께 1908년 최초의 독립단체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한 곳도 자신의 크라스키노 저택이었다. 800여 명으로 추정되는 대한의군의 숙식을 제공할 만큼 규모가 컸던 저택은 흔적도 없고 우수리스크에 남은 고택만이 ‘최재형기념관’으로 새로 단장됐다.
1909년 봄 안중근은 왼손 넷째 손가락(무명지)을 잘라 그 피로 태극기에 ‘대한독립(大韓獨立)’ 네 글자를 쓰고 11명의 동지와 함께 ‘동의 단지회 동맹(단지동맹)’을 결성했다. 그해 10월 대동공보사(사장 최재형)에서 이토 히로부미 처단 계획을 최재형과 논의한 안 의사는 같은 달 26일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주살(誅殺)했다. 최재형이 건넨 권총으로 한반도 불법 침략의 죄를 물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이다. 안중근 의거로부터 10년 뒤인 1919년 3월 17일 노령(露領, 러시아 땅)에서 최초의 임시정부인 ‘대한국민의회’가 생긴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황량한 벌판에 우뚝 솟은 검은색 비석에는 안중근 의사의 넷째 손가락이 잘린 왼손 모양이 또렷하게 새겨져 있다. 15개의 정사각형 돌은 열다섯 가지의 하얼빈 의거 이유를 상징했고, 단지의 형상은 핏방울 모양이다. 안중근 의사의 결기에 찬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우리의 목표는 두 가지. 첫째는 이토 히로부미를 주살하는 일이요, 둘째는 이완용을 처단하는 것이다.”
안중근의 왼손이 음각된 곳에 손을 얹고 사진을 찍는 탐방객에게 소감을 물어봤다.
지금은 석탄 하적장으로 변한 포시예트 항구는 두만강이 흘러드는 동해에 자리하고 있다. 11세 소년 최재형이 배고파서 가출한 뒤 쓰러져 러시아 선장 부부가 내민 구원의 손길을 붙잡고 ‘최 표트르 세메노비치’로 거듭난 곳이다. 마치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의 유진 초이(이병헌 분)처럼 노비의 아들이 훗날 독립운동가를 도운 것처럼. 훗날 남과 북이 자유롭게 오가고 러시아와 교역이 왕성하게 이뤄진다면 포시예트 항구 어디쯤 소년 최재형과 러시아인 선장을 한·러 우호의 상징으로 삼아 기념 동상이라도 세움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쑤이펀 강가의 발해 성터(추정지) 언덕 위에 올라서 보니 말떼가 갈기를 세우고 달려오고 있었다. 발해의 솔빈부(率濱府)는 말을 키우던 곳이다. 명마들의 질주를 바라보니 발해의 웅혼한 기상이 바람에 묻어났다. 최초의 임시정부를 세웠던 땅, 망명정부를 꿈꾸었던 땅이 다시 용틀임해 북방경제의 바람으로 되살아나기를 바라면서 말들의 질주를 지켜본다. 가슴에서 뜨거운 무엇이 솟구쳤다.
그러나 하얼빈 의거 이후 러시아는 일본의 압력으로 십삼도 의군 간부 이상설·이범윤 등 한인 지도자 20여 명을 체포해 투옥했다. 그 이후 한인의 정치활동은 큰 타격을 받았다.
한인들은 그러나 다시 일어섰다. 1911년 6월 1일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조창호 집에서 권업회(勸業會)를 발기했다. 1914년 권업회는 한인 이주 50주년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준비했다. 준비위원회 회장을 맡은 최재형은 재정을 책임지고 미주 신민회까지 초청해 대한제국의 건재를 만천하에 공표하려 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으로 무산됐다.
“무릇 한 줌 흙을 모으면/ 능히 태산을 이루고/ 한 홉 물을 합하면/ 능히 창해를 이루나니/ 작은 것이라도 쌓으면/ 큰물을 이룬다/ 아! 슬프다/ 우리 동포여.”
“총회가 열렸던 이 건물은 현재 우수리스크 11호 학교로 사용되고 있어요. 최재형 선생의 집과 불과 100여m 거리죠. 이 지역에서 한인들은 독립운동의 혼을 불태웠습니다.”
1919년 2월 총회는 ‘대한국민의회’로 개칭하고 3월 17일 공식 출범했다. 의장 문창범(1870~1934)은 연해주 니콜 리스크에서 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손병희를 대통령, 박영효를 부통령, 이승만을 국무총리로 임명했다. 제정 러시아의 동방정책으로 ‘동방을 정복하라’는 뜻을 지닌 블라디보스토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는 신한촌 기념비가 우뚝 서 있다. 고려인·대한민국·북한을 상징하는 세 개의 대리석 기둥이 하나가 되는 날은 언제일까.
“내 나이 여든여섯이오. 부모님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게 꿈이었소. 지금 내 꿈은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것이오. 원래대로 말이오.”
◆문영숙은
1953년 충남 서산 출생. 『안중근의 마지막 유언』 『독립운동가 최재형』 『카레이스키 끝없는 방랑』 『글뤽아우프 독일로 간 광부』 등을 집필해 ‘코리안 디아스포라 작가’로 불린다. ‘문학동네 문학상’ 등을 받았다. 최재형기념사업회에서 상임이사로도 활동 중이다.
우수리스크·크라스키노· 블라디보스토크=문영숙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