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일 오전 9시 7분 전북 전주시 노송동주민센터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40~50대로 추정되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였다. 주인공은 해마다 성탄절 전후로 찾아오는 '얼굴 없는 천사'였다. 전주시민들은 "이분이 진짜 산타"라고 입을 모은다.
노송동 주민센터에 A4용지 박스 두고가
현금 5020만원 담겨…타이핑한 편지도
"소년소녀가장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2000년부터 20차례 6억여원 익명 기부
전주시 "어려운 이웃에게 고루 나눠줄 것"
직원들은 주민센터 지하 주차장에서 A4용지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 안에는 5만원권 지폐 다발 10묶음과 동전이 담긴 돼지저금통이 들어 있었다. 주민센터 측이 세어 보니 5020만1950원이었다.
상자 안에는 컴퓨터로 타이핑한 글씨로 "소년소녀 가장 여러분 힘내십시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적힌 편지가 들어 있었다. 주민센터 직원들은 매년 비슷한 모양의 A4용지 상자에다 메시지 내용 등을 볼 때 이날 성금을 두고 간 남성을 '얼굴 없는 천사'로 보고 있다.
전주시에 따르면 그동안 '얼굴 없는 천사'가 건넨 성금은 생활이 어려운 4900여 세대에게 현금과 연탄·쌀 등으로 전달됐다. 앞서 노송동 주민들은 '얼굴 없는 천사'의 뜻을 기리고 그의 선행을 본받자는 의미에서 천사(1004)를 연상케 하는 10월 4일을 '천사의 날'로 지정했다. 또 주변 6개 동이 함께 '천사축제'를 열어 어려운 이웃을 돕고 있다.
전주시는 이날 '얼굴 없는 천사'가 준 성금을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지역의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 등 소외계층을 위해 쓸 예정이다. 19년째 이어져 온 '얼굴 없는 천사'의 선행은 전국에 익명의 기부자가 늘게 하는 이른바 '천사 효과'를 일으켰다.
앞서 대구 '키다리 아저씨 부부'도 성탄절 전날인 지난 24일 대구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오늘 저녁에 시간되는교? 같이 밥 한 끼 합시다"라고 전화를 걸어 1억2000만원짜리 수표가 든 봉투를 건넸다. 2012년 1월부터 이 부부가 익명으로 기부한 금액은 모두 9억6000여만원이다.
김승수 전주시장은 "한 도시의 위대함이란 건물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헌신·사랑 등 고귀한 정신의 가치에 있다"며 "'얼굴 없는 천사'는 전주를 위대한 도시로 만드는 소중한 자산"이라고 말했다.
전주=김준희 기자 kim.junh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