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서소문 포럼

[서소문 포럼] 문재인 대통령의 크리스마스 선물

중앙일보

입력 2018.12.25 0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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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렬 경제 에디터

1998년 8월 노무현(당시 국민회의 부총재)은 울산에 있었다. 현대자동차는 폭풍 전야였다. 외환위기로 극심한 판매 부진에 빠진 현대차는 정리해고 카드를 빼 들었다. 근로자 4만6000여 명 중 고용 조정 대상으로 분류된 이가 1만여 명. 이 중 1569명을 정리해고한 것이었다. 노조는 단 1명의 정리해고도 수용할 수 없다며 전면파업에 들어갔다. 공장은 멈춰섰다. 노사는 한 치 양보 없이 대치했고, 정부와 재계에선 공권력을 투입하자는 목소리가 높아갔다.
 
그때 노무현은 국민회의·노사정위원회 합동 중재단을 이끌고 있었다. 그는 노사 양쪽을 강하게 압박했다. 회사 측엔 “공권력 투입을 기대하지 말라”고 했고, 노조 측엔 “규모를 최소화해서라도 정리해고를 받아라. 방법이 없다”고 했다. 결국 중재단의 노력은 결실을 봤다. 노사는 277명 정리해고, 2년간 정리해고 자제 등에 최종 합의했다.

DJ·노무현, 경제 회생 위해 지지층 반대 돌파
문 대통령 규제혁파 등 경제 살리기에 올인하길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김대중(DJ) 대통령은 중재단의 노력을 칭찬하지 않았다. 대신 “정치권의 지나친 개입은 유감”이라며 질책했다. DJ라고 현대차 사태가 공권력 투입 없이 노사 합의로 끝난 것이 왜 기쁘지 않았을까. 그가 기쁨을 표시한 것은 열흘이나 지나 울산시 업무보고 자리에서였다. 당시엔 지켜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국제사회는 한국 정부가 구조조정 원칙을 지키는지를 주시하고 있었다.
 
DJ라고 정리해고가 달가울 리 없었다. 사실 정리해고에 관한 한 ‘2년 유예’가 그의 대선 공약이었다. 그를 돌려세운 것은 부도 위기의 나라 상황이었다. 97년 대선 당일인 12월 18일의 외환보유액은 39억 달러. 연말 예상치는 ‘마이너스 6억 달러~플러스 9억 달러’였다. DJ는 당선 직후 미국 재무 차관 데이비드 립튼을 만나 정리해고제·외환관리법 개정 등 ‘(IMF와 애초 협약엔 없는) IMF 플러스’ 개혁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해서 선진 13개국과 IMF의 1백억 달러 조기 지원 결정과 외채 만기 연장을 이끌어낸 것이었고, 한국 경제는 부도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DJ는 물론 어느 대통령인들 정리해고를 반겼을까. 그러나 나라 경제를 도산 위기에서 건져내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통령이라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게 대통령의 자리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대통령 노무현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결심한 것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노 대통령 사후 노무현재단이 엮은 노무현 자서전 ‘운명이다’엔 이 부분이 이렇게 표현돼있다.
 
“나는 국민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권하고 싶었다. 의욕이 지나쳤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사의 흐름을 타고 과감한 도전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미 FTA는 자서전에 나와 있는 대로 그의 지지층이 등을 돌리게 만든 결정적 선택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대한민국이 부강해지는 길을 찾았고, 지지층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 길을 갔다. 당시 청와대의 한 참모는 한·미 FTA에 대한 세간의 비판과 반발을 노 대통령에게 이렇게 전달했다.
 
“지금 시중에선 다음 선거에서 이기려고 한·미 FTA 이슈를 꺼낸 것으로 여깁니다.” 어차피 실현되지 않을 선거용 소재로 한·미 FTA를 바라본다는 음모론을 전한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그 참모에게 이렇게 반문했다고 한다. “사람들이 대통령을 정말 그렇게 생각합니까.”
 
노 대통령은 끝내 한·미 FTA를 성사시켰고, 그것은 노 대통령이 한국 경제에 안긴 크나큰 선물이 됐다. 자동차 산업을 근간으로 한 한국의 제조업은 이후 새로운 활로를 찾았다.
 
진보 진영의 대통령 집권 시에 정리해고가 법제화되고 한·미 FTA가 타결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 중 한 대목이다. DJ와 노무현, 두 대통령 모두 한국 경제를 살리고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해 지지층의 반대를 정면으로 돌파했다. 그것이 그들의 위대한 리더십이다. 그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의 최근 인식 전환은 한국 경제를 염려하는 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모은다. 문 대통령은 산업통상자원부 업무보고에 완성차와 부품업체 최고경영자(CEO)들을 초대해 그들의 의견을 경청했다. “고용 문제에서는 지금까지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엄중한 평가”라며 자성의 목소리를 냈고, “이대로 가다간 산업 생태계가 무너지겠다고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는 위기감도 전했다. “우리 경제 기조는 올바르다”고 고집을 부리던 지난 여름과 확 달라진 모습이다.
 
문 대통령이 여기서 멈추지 말고 경제 살리기에 ‘올인(all in)’하기를 바란다. 지지층과의 한판 대립을 각오하고 경제의 발목을 잡는 규제 혁파에 앞장서주기를 바란다. 인기를 끌었던 공약이라도 경제가 어려우니 잠시 접어두자고 호소하는 용기를 발휘하길 바란다. 그것이야말로 한국 경제가 기다리는 크리스마스 선물일 것이다.
 
이상렬 경제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