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학번인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땐 전략 따위 필요 없었다. 누가 엉덩이에 땀띠 나도록 책상 앞에 더 오래 앉아 있는지가 성적을 좌우한다고들 했다. 인강(인터넷 강의)도 1타 강사도 없던 시절, ‘성문종합영어’와 ‘수학의 정석’을 달달 외도록 들이 파는 게 왕도로 통했다. 다만 ‘운발’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긴 했다. 마침 그해 학력고사는 국어가 제일 어려웠고 수학은 쉬운 편이었다. 천생 문과 체질이라 수학에 약했던 나로선 변별력 낮은 문제들을 출제해 주신 위원들께 그저 감사할 따름. 언젠가 86학번 선배에게 이 얘길 하자 대뜸 코웃음을 쳤다. “출제위원이 아니라 우리한테 고마워해야 돼. 우리 때 수학을 너무 어렵게 내서 왕창 욕 먹은 뒤 너희 땐 쉽게 낸 거야.” 예나 지금이나 대입 시험의 난이도 조절은 난제 중 난제인 모양이다.
암기력 재는 입시 막다 부모 스펙이 좌우하는 괴물 낳아
대입 개혁 떠넘기기 하는 당국자들, 드라마 보며 반성을
#“걔, 학종으로 의대 합격했어요. 내신 관리는 어떻게 했는지, 자소서엔 뭘 썼는지, 봉사 활동과 동아리는? 그 포트폴리오가 절실하게 필요해요.”(‘SKY캐슬’ 중)
11학번인 딸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첫 입시설명회에 갔다가 입이 쩍 벌어졌다. 자료 속 수시 전형의 종류가 족히 수천 개에 달했다. 워킹맘 주제에 그걸 죄다 파악해서 일일이 스펙을 갖춰 주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모 아니면 도’의 각오로 우리 애한테 가장 잘 맞을 듯한 단 한 개의 전형을 골라 올인 전략을 펼쳤다. 요행히 ‘재수 없이’ 단번에 성공하긴 했지만 솔직히 3년 내내 불안에 떨어야 했다. ‘뭐가 필요할지 몰라 다 준비해 봤어’ 식으로 아이들을 이리저리 굴리는 다른 엄마들을 보면서 말이다.
수많은 수시 전형 중에서도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은 대표적인 ‘금수저 전형’으로 꼽힌다. 학종을 위해 교수 부모가 자기 논문 공저자로 아들딸 올려주다 적발되자 요즘은 끼리끼리 품앗이를 한다는 소리까지 들린다. 지난 3년간 내리 세 딸의 입시를 치른 지인한테 들으니 “교내 대회의 상이란 상은 모두 있는 집 애들한테 몰아주는 게 한눈에 보이더라”고 했다. 그러면서 학종이란 “부모가 스펙 관리해줄 수 있는 극소수 아이들을 위한 특혜”라고 딱 잘라 말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도 비슷한 불만이 줄을 잇는다. ‘정시가 암기력만 평가한다고 뭐라 하던데 그럼 대체 수시 전형은 뭘 보는 제도인가? 재력 아니면 인맥? 그게 대학 수학 능력과 뭔 상관인가….’
대통령도 며칠 전 교육부 업무보고에서 이런 문제점을 지적했다. “내신이나 학생부의 경우 도대체 어떻게 평가되는지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공정성을 믿지 못하고…부모 입장에서는 깜깜이”라는 거다. 이제 드디어 대통령까지 나섰으니 뭐가 좀 달라지려나. 아닐 가능성이 크다. 지난여름 대입 제도 개선한다고 요란을 떨더니 서로 책임 안 지려고 떠넘기기만 했던 행태, 다들 기억하실 게다. 부디 당국자들이 요즘 화제의 드라마 ‘SKY캐슬’이 실감 나게 드러내는 학종의 민낯부터 직시하길 바란다. 오죽하면 국민들 입에서 “차라리 전두환 정권 때 교육정책이 백번 낫다”는 소리가 나오겠나.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