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분수대] 포토라인 폭력

중앙일보

입력 2018.12.10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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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언 논설위원

“면목이 없습니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봉하마을에서 이렇게 심경을 표현하고 버스에 올랐다. 4시간 뒤 서울 대검찰청에 당도한 버스에서 내려 포토라인 앞에 선 그에게 한 기자가 물었다. “왜 면목이 없다고 하셨나요?” 노 전 대통령은 잠시 침묵한 뒤 짧게 답했다. “면목 없는 일이지요.” 2009년 4월 30일, 그 모습이 TV로 전국에 생중계됐다.
 
그 기자가 의도했든, 아니든 ‘왜 면목이 없다고 했느냐’는 질문에는 혐의(박연차씨 뇌물 수수)를 인정하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 아니냐는 추궁의 뉘앙스가 담겼다. 잔인한 공격으로 보일 수도 있는 장면이었다. 23일 뒤 노 전 대통령은 비극적으로 삶을 마감했고, 그 질문을 던진 기자는 한동안 괴로운 나날을 보냈다.
 
그날의 검찰청사 현관 앞 문답은 이렇게 진행됐다. 질문을 딱 세 개만 하기로 검찰 측과 대검찰청 담당 기자들이 약속했다. 그 뒤 기자단 협의로 질문을 맡을 신문·방송·통신사 기자 한 명씩이 선정됐다. 질문 세 개는 공동으로 준비했다. ‘면목’을 언급한 기자는 각본대로 자기 역할을 한 것뿐이었다. ‘거물급’ 인사 검찰 소환 때는 이와 비슷한 일이 늘 벌어진다.
 
“혐의를 인정하십니까?” “국민에게 하고 싶은 말씀 없으십니까?”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다가 검찰청 또는 법원(영장실질심사의 경우)으로 들어서는 피의자에게 달려들어 스마트폰이나 ‘와이어리스’라고 불리는 무선 녹음장치를 들이대며 이렇게 묻는다. 이런 바보 같은 질문도 드물다. 그때까지 혐의를 부인하던 사람이 갑자기 달라졌을 리 만무하고,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인터뷰를 하든, 페이스북에 쓰든 진작 했을 것이다. 그러니 대개 답은 “국민께 심려를…” “성실히 조사를…” 수준이다.


외국에도 이런 일이 있을까. 적어도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나라에선 없다. 검찰청사 안에 포토라인을 만들고 그 앞에 소환자를 세우는 장면을 외국 드라마에서 본 적이 있는가. 구속영장 발부 여부를 가리기 위한 재판에 검찰 직원이 수갑을 채워 피의자를 데리고 가는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나라도 없다.
 
‘인권 변호사’ 출신이고, 그 누구보다 ‘조리돌림’의 폐단을 잘 아는 분이 대통령이 됐기에 이런 야만적 관행이 없어질 줄 알았다. 물론 언론의 책임도 크다. 하지만 검찰이 막으려면, 안 하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일이다. 후진적 포토라인 폭력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당신, 또는 당신이 아끼는 사람도 ‘인격 살인’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