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과 스페인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흐릅니다. 양국은 오랜 시간 ‘스페인 속 작은 영국’으로 불리는 지브롤터를 두고 신경전을 벌여왔지요. 인구 3만명가량의 작은 항구 도시 지브롤터는 스페인 최남단에 붙어있지만 영국 영토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주인이 영국으로 바뀐 지 300여년이 흘렀는데 스페인은 여전히 ‘내 땅을 돌려달라’고 요구하지요. 최근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를 계기로 갈등이 다시 불붙었다가 지브롤터 문제는 향후 두 나라가 직접 협의키로 하면서 일단락됐습니다.
대체 어떤 사연인 걸까요. [알고 보면 쓸모 있는 신기한 세계뉴스, 알쓸신세]가 스페인의 속사정과 나라 간 음식전쟁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신개념 추로스 등장?…SNS서 “문화도용” “기괴한 것” 비난
나라 간 자존심 건 원조 경쟁에 프렌치프라이·파블로바·후머스 ‘수난’
으깬 감자로 만든 영국식 추로스…“모독이다”
“어디서부터 이런 말도 안 되는 얘기를 해야 할지 모르겠네. 스페인 사람들은 추로스를 디저트로 먹지 않는다. 시큼하지도 않다. ‘완전한 모독’이다. ”
한 스페인 출신 여성 번역가가 최근 자신의 트위터에 올린 글입니다. 분노가 전해지나요? 첨부한 사진에는 먹음직스러운 추로스가 놓여 있는데요. 영국 4대 수퍼마켓 체인인 모리슨스가 크리스마스를 맞아 선보인 3.5파운드(약 5000원)짜리 치즈 추로스입니다.
주문을 받아 20일부터 팔 예정인데 스페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벌써 수난을 겪고 있지요.
반감을 드러내는 밈(meme·인터넷상 재미있는 이미지)은 물론이고, 영국과의 전쟁을 선언하는 이미지도 등장했습니다.
밀가루와 소금, 물, 버터로 만든 반죽을 기계로 길쭉하게 짜낸 뒤 기름에 튀긴 ‘추로’는 스페인의 전통요리로 추로 여러 개를 뜻하는 게 바로 추로스입니다. 스페인에서는 아침에 식사 대용으로 또는 낮 동안 간식으로 먹습니다. 해장할 때도 추로스를 찾을 정도이지요. 초콜릿에 찍거나 걸쭉한 초콜릿 음료와 함께 먹기 때문에 단맛이 강합니다.
모리슨스가 내놓은 추로스는 반죽이 아닌 매쉬 포테이토(으깬 감자)로 만드는데다 안에 치즈가 가득하고 이를 또 토마토소스, 고추 살사(소스)와 곁들여 먹는 게 특징입니다. “우리의 치즈 추로스는 스페인 레시피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면서도 “대신 짭짤한 버전을 원했던 것뿐”이라는 게 모리슨스 측의 주장인데요. “우리 고객들은 대중적인 고전(음식)을 변형했을 때 감동한다”라고도 설명합니다. 하지만 가뜩이나 영국과 해묵은 영토분쟁을 벌이고 있는 스페인 입장에서 달가울 리 없겠지요.
‘후머스’ 전쟁…원조 싸움하다 기네스 기록 경쟁으로
“새로운 전쟁이 레바논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깨뜨렸다. 이번엔 총과 영토라기보다 병아리콩과 파바콩(누에콩)에 관한 것이다.”
실제 전쟁을 벌였던 두 나라가 중동 음식의 대표선수인 후머스(hummus)를 두고 충돌한 걸 두고 2008년 가디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후머스는 이집트콩인 병아리콩을 으깬 뒤 레몬주스와 소금, 참기름으로 조미하는 것으로 빵에 묻혀 먹는 음식입니다. 소스와 같지요. 이들 지역서 매일 식탁에 오르다시피 하는 우리네 김치 같은 존재랄까요.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자 레바논은 다소 엉뚱한 방향으로 전투를 선언합니다. 2009년 10월 ‘대형 후머스 만들기’ 행사를 연 건데요. 세계 최대 크기의 후머스를 만들면 소유권을 널리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 판단했나 봅니다. 당시 2000㎏ 넘는 거대한 후머스가 탄생했고 이전 이스라엘이 세운 기네스 기록이 깨졌지요.
이스라엘이 가만있을 리 없습니다.
3개월 뒤 방송국에서 빌린 대형 위성방송 수신 접시 위에 4000㎏ 넘는 후머스를 만드는 데 성공했지요. 그로부터 넉 달 뒤 레바논이 반격에 나서 또다시 신기록을 세웁니다. 요리사 300여명을 투입해 무려 1만450㎏의 후머스를 만든 건데요. 이후 이스라엘의 대응은 없었고 레바논은 기록을 보존해왔습니다.
미련을 못버린 이스라엘은 관광지에서 전 세계인을 상대로 후머스를 ‘이스라엘의 국가 간식’이라 쓴 엽서를 팔기 시작했다고 하지요. 영국 BBC는 “많은 사람에게 후머스가 어디에서 왔는지에 대한 질문은 애국심과 정체성의 문제”라고 전했습니다.
후머스의 기원은 여전히 논란거리입니다. 가디언은 “한 전설에 따르면 후머스는 12세기에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치하던 술탄, 살라딘에 의해 처음 나왔다”고 하는데요. 중세 아랍 음식 전문가인 찰스 페리는 시리아의 수도인 다마스쿠스가 후머스의 기원일 가능성이 크고, 중세 시대 풍부한 레몬 공급지였던 베이루트(레바논의 수도)가 두 번째로 유력한 원산지라고 주장한 바 있습니다.
전통 디저트 ‘파블로바’도 시끌…프렌치 프라이? 벨지언 프라이?
‘오지(호주인)’와 ‘키위(뉴질랜드인)’간 분쟁도 만만치 않습니다. 한국과 일본만큼 가깝고도 먼 두 나라는 머랭(계란 흰자와 설탕을 저어 만든 거품)을 기초로 한 ‘국민 디저트’ 파블로바(pavlova)의 원조가 어디인지를 두고 30년 넘게 논쟁을 벌여왔지요.
2008년 존 키 뉴질랜드 총리가 집권 후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호주의 주장을 “완전히 우스운 것”이라고 깎아내리며 동맹국들에 파블로바의 기원을 뉴질랜드로 인정해달라고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호주에선 1935년 호텔 주방장 버트 사치스가 러시아의 전설적인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의 호주 방문을 기념해 파블로바를 개발했다고 믿는데요. 호주 국립사전에도 파블로바는 ‘가장 유명한 호주 디저트’로 소개돼 있습니다.
뉴질랜드는 나름의 논리로 반박합니다. 오타고대학의 헬렌 리치는 수 백개의 파블로바 레시피가 담긴 책들을 분석한 결과 호주에서 파블로바가 등장하기 이전 이미 뉴질랜드 서적에서 요리법이 나와 있었다고 주장하지요.
패스트푸드의 대명사인 프렌치프라이를 두고도 설전이 끊이지 않습니다. 벨기에는 원조를 주장하며 벨지언 프라이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올리려 했는데요.
미국 제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프랑스에서 팔던 감자튀김을 먹은 뒤 프랑스 요리로 소개했다는 얘기도 있지요.
우리나라와 일본 사이에는 김치 대첩이 있었지요. 1996년 일본은 국제식품규격 표준으로 ‘기무치(kimuchi)’를 등록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국제식품규격위원회(CODEX)가 결국 한국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2013년 유네스코에서는 우리 김장 문화를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올렸지요.
CNN은 “모든 시대, 모든 대륙에서 나라들은 전통음식의 기원을 두고 싸웠다. 외교적 불화로까지 번졌고, 위협이 있었다. 정치적 동맹이 깨지기도 했다”고 전합니다. 음식은 문화와 역사를 품고 있지요. 많은 나라가 음식으로 브랜드 가치를 높입니다. 나라 간 종교전쟁 못잖게 음식전쟁이 치열한 이유일 겁니다.
황수연 기자 ppangshu@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