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에게 이름이 있듯, 모든 기업에도 이름이 있다. 사명(社名)이다. 이 사명만 잘 알아도 때론 돈이 보인다. 해당 기업이 어떤 방향성(전략)을 갖고 움직이는지, 시장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는지, 과거엔 어땠으며 미래엔 어떤 모습일지 윤곽을 나타내는 역할을 해서다. 특히 기존에 있던 사명을 변경하는 경우야말로 기업 입장에선 산업계 전반은 물론 소비자와 투자자 모두에게 ‘경영상의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안내하는 의미와 같다. 그 과정에서 실적이 요동치기도, 주가가 출렁이기도 한다.
사명(社名) 변경의 경제학
대표적인 예가 LG그룹이었다. 1947년 설립된 ‘락희화학공업(현 LG화학)’이 그룹의 모체인 LG는 이후 ‘금성사(현 LG전자)’를 세워 가전제품 부문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여기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기업 규모가 과거엔 상상할 수 없었을 만큼 커지기 시작했다. 치약과 비누 같은 기초화학 분야 생활용품 제조사로 출범했던 기업이 순식간에 각종 가전을 글로벌 시장에 내다파는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그러면서 화학 업종에서도 동반 성장하고, 다른 분야에까지 투자해 수익을 올리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졌다.
‘럭키→럭키금성→LG’ 차례로 이름 바꿔
그룹 사정에 정통한 LG의 한 전직 임원은 “당시 럭키금성이라는 이름은 국내에서 이미 강력한 브랜드 파워를 갖고 있어 주변에서 사명 변경에 대한 반대 의견이 많았다”며 “하지만 구본무 회장께서 글로벌 기업으로 대성(大盛)하려면 변경이 꼭 필요하다며 추진력 있게 (변경을) 실행에 옮겼다”고 회상했다. 해외 투자자나 소비자들이 기다랗고 발음하기 어려운 럭키금성보다 LG를 더 친숙하게 여길 것은 자명했다. 구 회장은 지금까지도 남아 LG를 상징하는 기업 로고 ‘미래의 얼굴’을 직접 최종 선택하면서 이런 사명 변경에 힘을 실었다. 이때의 사명 변경은 탁월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구 회장이 그룹을 이끈 23년 간 LG의 전체 매출은 연간 30조원(1994년)에서 2017년 160조원으로 5배 이상으로 커졌는데, 이 중 해외에서 발생한 매출만 10조원에서 110조원으로 11배로 급증하면서 국내 실적을 압도했다.
화장품 제조가 주력 사업인 아모레퍼시픽그룹도 비슷한 이유로 사명을 변경해 마찬가지로 크게 성공한 경우다. 1945년 설립된 ‘태평양화학공업사’가 전신인 아모레퍼시픽은 애초 태평양이라는 사명 하에 화장품 외의 많은 분야에서 오랜 기간 사업 다각화에 도전했다. ‘태평양증권’ ‘태평양전자’ ‘태평양물산’ ‘태평양패션’ 등으로 70~80년대 경제 호황기 국내 산업계에 유행처럼 번졌던 사업 다각화 흐름에 동참, 몸집 키우기에 나섰다. 다만 LG의 경우와 달리 사업 다각화 자체는 실패였다. 경영진과 그룹 인력 전반의 신사업에 대한 이해도 부족과 각 사업 간 시너지 효과 발생 실패로 본업인 화장품을 제외한 다른 분야 다수에선 적자가 발생했다. 1990~2000년대 들어서는 비(非)주력 계열사를 잇따라 매각하는 ‘선택과 집중’에 힘써야 했다.
이렇게 해서 모은 자금 대부분은 화장품 연구·개발(R&D)과 브랜드 마케팅 같은 핵심 역량을 강화하는 데 투입했다. 그러는 한편 글로벌 화장품 시장 공략에 한층 전념했다. 사명을 한글인 태평양에서 2006년 영문인 ㈜아모레퍼시픽으로 변경(태평양이 인적 분할돼 신설 회사로 출범하면서 화장품 등 주요 사업을 전담)한 것도 글로벌 시장에서 세련된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고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였다. 1964년 일찌감치 화장품 브랜드 이름으로 도입했던 ‘아모레(이탈리아어로 ‘사랑(love)’을 의미)’와 기존 사명인 태평양을 뜻하는 영단어 ‘퍼시픽’을 결합해 만들었다. 이후 지주사인 태평양까지 2011년 사명을 아모레퍼시픽그룹으로 바꿨다.
2003년 7%가량에 불과했던 아모레퍼시픽의 해외 매출 비중은 2015년 약 40%에 육박했다. 송재용 서울대 교수는 “중화권 핵심 도시부터 공략한 후 10년여 동안 차근차근 사업 범위를 넓히는 식의 단계적 글로벌 진출 지역 확장 전략이 주효했다”고 분석했다. 비록 이후 중국의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 등 한계에 부딪히면서 최근 들어선 성장세가 한풀 꺾였지만 여전히 글로벌 화장품 업계 강자 중 하나다.
‘모터스’ 뗀 테슬라, ‘게임즈’ 뗀 넷마블
경영진 입장에선 자동차 사업을 하는 기업이라는 뜻에만 국한된 기존 사명 대신, 자동차 외에 에너지 등으로 다각화한 각종 사업을 포괄하는 사명이 필요하다고 봤다는 얘기다. 실제 테슬라는 2016년 미국의 태양열 패널 제조사 ‘솔라시티’를 인수하면서 신재생 에너지의 대표 분야로 꼽히는 태양광 사업에 뛰어들었고, 일본 기업 파나소닉과 제휴해 태양전지를 생산하는 데 나섰다. 아울러 에너지저장시스템(ESS)이나 리튬이온전지 분야에도 관심을 갖고 사업 다각화를 진행 중이다. 비슷한 사례는 국내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지난 상반기 기준 국내 2위 게임 업체인 넷마블은 앞서 3월 주주총회에서 사명을 기존 ‘넷마블게임즈’에서 넷마블로 변경할 것을 결의했다고 밝혔다. 이로써 2000년 설립 당시 넷마블로 첫 발걸음을 내디뎠던 이 회사는 우여곡절 끝에 다시 첫 이름 그대로를 갖게 됐다.
규모가 큰 게임 업체임에도 사명에서 ‘게임즈’를 뗀 이유는 테슬라의 경우처럼 사업 다각화를 본격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다. 권영식 넷마블 대표는 “상장 이후 확보한 자금을 통해 다양한 사업 영역에 투자할 계획”이라며 “게임 중심의 사업은 유지하되, 회사의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해 본업과 접목이 가능한 신기술 분야 투자를 계속해서 늘리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금까지 경영진 구상엔 구체적으로 인공지능(AI)·가상현실(VR)·증강현실(AR)·블록체인 등의 분야가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 R&D 인력을 늘리면서 AI와 블록체인의 연계 플랫폼 구상과 같은 후속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박성훈 전 넷마블 대표는 지난 8월 공식석상에서 “AI와 블록체인 신기술의 활용처로서 게임은 어느 산업 분야보다 연관성이 크다”며 “신사업들과 게임 간 연계를 강화해 사업을 확대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단지 사업 다각화라는 기업의 방향성에 대한 소비자들의 직관적 이해를 돕기 위함일까. 이는 표면상 사명 변경의 가장 큰 이유이고 실제로 주된 이유 중 하나임에 분명하지만, 이면에선 다른 이유도 있다는 게 산업계의 해석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소비자는 물론 투자자들에게 사세(社勢) 확장을 과시하는 의미가 있는 사명 변경”이라며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사업에 힘쓰는, 성장성이 큰 기업이라는 인식을 심어줘 투자 유치에 탄력을 받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한마디로 ‘우리를 믿고 지속적으로 투자해 달라’는 무언의 제스처라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사명 변경 전인 2016년 적자 지속과 성장성 논란에 100~200달러대를 횡보하면서 지지부진했던 테슬라 주가(나스닥)는 지난해 사명 변경 후 급등해 연말까지 300달러대를 유지했다.
물론 사명 변경 효과가 증시에서 곧바로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다. 넷마블은 사명 변경 후 아직까지 주가가 지지부진하다. 그러나 CJ E&M 산하였던 2014년 이미 중국 텐센트로부터 5300억원대의 거액을 투자받고 물적 분할된 뒤, 지난해 기업공개(IPO)로 상장하면서 한층 자금력을 끌어올린 상태다. 눈앞보다 5년에서 10년 후를 내다보고 신사업에 나선다는 방침이다. 증시 전문가들은 사업 다각화 선언 자체가 빠른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 만큼, 투자자들이 보다 신중하게 접근할 것을 주문한다.
미국 투자정보 분석 업체 CFRA리서치의 에프레임 레비 연구원은 지난 8월 외신 인터뷰에서 “부채가 많은 테슬라의 자금력은 아직 회의적이고, 투자자들의 지지를 변함없이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했다. 테슬라는 솔라시티 인수 후에도 90% 이상의 수익을 전기차 부문에서만 올리고 있으며, 그조차 눈에 띄는 성과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테슬라의 사업 다각화가 성공하기까지 몇 년이나 걸릴지 알 수 없으며, 당분간은 회사 실적에서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이 작아지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대우’ 버린 한국GM, 안 버린 대우전자
사명 변경에 경영권까지 GM으로부터 넘겨받았음에도 지분 및 제휴 관계는 꾸준히 유지됐다. ‘르망’ 등 히트작의 탄생으로 성장에 탄력을 받은 대우자동차는 1992년 GM 지분까지 인수하면서 독자 경영에 나섰다. 하지만 그룹 해체와 법정관리의 아픔을 겪으면서 2002년 다시 GM이 대우자동차를 인수한다. 그러면서 탄생한 기업 이름이 GM과 대우자동차의 만남을 뜻하는 ‘GM대우’였다. GM대우는 2011년 사명을 한국GM으로 변경해 오늘날까지 유지하고 있다. 9년 간 유지했던 GM대우 사명을 한국GM으로 바꾼 데 대해 한국GM 측에선 “당시 ‘쉐보레’ 브랜드를 도입하면서 국내 소비자들에게 새롭고 친밀한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서였다”는 입장이다. 그해 한국GM은 승용차 26만대를 만들어 국내외에 판매한 성과를 내며 그간의 침체에서 벗어나기 위한 신호탄을 쐈다.
다만 자동차 업계 안팎에선 한국GM이 사명에서 ‘대우’를 뗀 데 대해 “대우그룹과 대우자동차라는 ‘실패한 기업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려는 작업의 일환이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분분했다. 그렇지 않으면 굳이 GM대우가 한국GM으로 바뀔 이유가 없다는 얘기다. 예컨대 2000년 설립돼 여전히 ‘SM’ 시리즈 등의 제품을 내놓고 있는 르노삼성자동차는 삼성과의 연관성이 작아진 이후에도 시장 선도 기업 이미지가 강한 ‘삼성’ 브랜드 유지를 위해 사명을 변경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삼성그룹은 고 이병철 창업주의 숙원 사업 분야이자 이건희 회장의 주요 관심 분야였던 자동차 사업 진출을 위해 1995년 삼성자동차를 출범시켰다. 이후 삼성자동차는 1998년 첫 양산 모델을 출시했지만 때마침 터진 외환위기에 고배를 마셨다.
이렇듯 자동차 업계에선 사명 변경으로 홀대된 대우 브랜드이지만, 전자 업계에선 거꾸로 우대되고 있다. 대우전자는 대우그룹 해체 후 대우일렉트로닉스로 이름을 바꿨다가 2013년 동부그룹(현 DB그룹)에 인수되면서 동부대우전자로 또 이름을 바꿨다. 이때도 대우 브랜드를 유지했지만, 올 2월 중견 가전 업체 대유위니아의 모기업인 대유그룹이 인수하면서는 아예 사명을 대우전자로 변경했다. ‘대유대우전자’라는 이름도 검토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결국 대우 브랜드를 오히려 극대화하는 전략을 택한 셈이다.
업계 관계자는 “대우 브랜드는 아직 동남아 등 해외 시장에서 인지도가 높다”며 “대기업들 틈바구니에서 내수 중심의 사업 포트폴리오에 한계를 느껴 해외 쪽으로 사업을 확장하려는 생각을 가진 대유그룹으로선 발음에 혼선을 주는 자사 이름(=대유)을 포기하면서까지 대우 브랜드를 지키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해석했다. 공략처가 내수에 국한된 한국GM이 국내에선 불리한 대우 브랜드를 버렸다면, 내수뿐 아니라 해외 공략에도 힘써야 하는 대유그룹은 해외에서 유리한 대우 브랜드를 지키는 쪽으로 승부수를 던졌다는 얘기다. 사명 변경에서 이런 치밀한 셈법은 자주 적용되고 있다. 모바일 메신저 ‘카카오톡’으로 대성공한 카카오가 2014년 포털 업체 ‘다음커뮤니케이션’과 합병하면서 사명을 ‘다음카카오’로 바꾸고, 2015년 다시 지금의 카카오로 변경한 이유도 네이버에 이은 ‘만년 2인자’의 이미지가 강한 포털 다음(Daum) 브랜드를 떨쳐내기 위해서였다는 분석이다.
사명 때문에 눈치 보이는 대한항공·광동제약
반대로 오래된 사명을 쉽게 바꿀 수 없는데, 안 바꾸자니 눈치가 보이는 애매한 경우도 있다. 1963년 설립된 광동제약은 고 최수부 창업주가 ‘광동제약사’라 이름 붙인 사명을 거의 그대로 쓰고 있지만 지난 2007년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사업 목적을 확실히 하라”며 사명 변경을 권고 받아야 했다. 제약사치고는 사업 포트폴리오에서 의약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작으니 사명에서 ‘제약’을 떼는 게 어떻겠느냐는 지적이었다. 광동제약은 지난해 매출이 1조1415억원으로 국내 제약사 중 상위권에 위치했지만 ‘제주삼다수’ ‘비타500’ ‘옥수수수염차’와 같은 단순 음료제품 매출 비중만 54.6%에 달해 “무늬만 제약사”라는 달갑잖은 평을 일각에서 받고 있다. 제약이라는 단어가 사명 안에서 가지는 상징성이 워낙 크다 보니 겪는 해프닝이다. 알면 알수록 복잡한 사명의 세계다.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