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의 퍼스펙티브] 대통령의 독서 정치
노무현 경제 참모 변양균의 책
『경제 철학의 전환』은
문재인 대통령에 보내는 전상서
이 정부 경제 이념 실현할 처방
절절히 담았지만 청와대는 외면
변양균 “이 정부서 내 역할 없다”
“얼어붙은 정신의 바다를 깰 도끼”
대통령이 읽고 균형 찾았으면
지난 9월 28일 작은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 청와대는 이정동 서울공대 교수를 불러 특강을 들었다. 대통령이 이 교수의 저서 『축적의 길』을 탐독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다시 잠깐 기대를 했다. ‘혁신과 축적’에 대해 쓴 책을 대통령이 읽고 그 사실이 알려져 청와대 비서관들이 강의를 들었다니 얼마나 고무적인가. 이정동 교수는 "주로 경제 본질의 문제, 혁신에 대해 말했다”고 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참석자는 주로 정책실 산하 비서관·행정관이었다고 한다. 대통령과의 면담도 없었다. 대통령이 실제 책을 읽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이 교수는 "대통령이 실제로 책을 읽었느냐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대통령이 읽었다더라’는 말만으로 메시지 전달이 충분하다”고 했다. 이 교수는 ‘독서 정치’의 본질을 꿰고 있었다. 이즈음 경제부총리와 청와대 정책실장의 동시 교체설이 돌기 시작했다. 『축적의 길』이 대통령의 진짜 메시지였다면 혁신에 방점이 찍히는 인사가 이뤄졌을 것이었지만, 결과는 반대였다.
대통령은 19일 또 한 권의 책을 소개했다. 5박 6일의 아세안·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마치고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읽었다는 『당신이 옳다』다. 그는 이 책을 읽고 "공감과 소통이 정치의 기본이라고 늘 생각해왔지만, 내가 생각했던 공감이 얼마나 얕고 관념적이었는지 새삼 느꼈다”고 페이스북에 썼다. 어떤 공감, 어떤 소통 부족을 말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저자인 정혜신 박사가 쌍용자동차 해고자를 위한 심리치료센터를 만든 인물이고 보면 노동 쪽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대통령은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탄력 근로제를 논의하면 국회도 그 결과를 기다려 줄 것”이라며 탄력 근로제 연기 방침을 밝혔다. 이달 초 여·야 대표를 모아놓고 대통령 자신이 한 약속마저 뒤로 물리고 불법 파업을 불사하며 거칠게 정부를 밀어붙인 노조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대통령의 독서 정치는 메시지 전달뿐 아니라 ‘구인’의 수단이기도 하다. 대통령은 최근 권구훈 골드만삭스 이코노미스트를 북방경제협력위원장으로 발탁했다. 3년 전 명견만리에 출연했던 그의 강연을 눈여겨봐 뒀다가 추천했다고 한다. 김현철 경제보좌관도 대통령이 그의 책 『저성장 시대,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를 읽고 발탁한 경우다. 김현철은 "대통령이 저의 책을 읽고 만나자고 했다”고 말한 바 있다. 장하성 정책실장 발탁도 평소 대통령이 그의 책을 읽고 공감한 게 큰 이유라고 알려졌다. 홍장표 경제수석 발탁도 2014년 그의 논문 ‘한국의 기능적 소득분배와 경제성장’이 계기였다.
독서 정치가 물론 문재인 대통령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한국 독서 정치의 시작은 노무현 전 대통령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김한길 전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는 "다독으로는 DJ를 따를 이가 없지만, DJ의 독서 편력을 정치라고 보긴 어렵다. 반면 노무현 대통령은 책을 읽고 감동하면 그 사람을 직접 데려다 중책을 맡기기도 했다. 책을 활용해 철학과 메시지를 전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독서 정치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부드러운 개입’을 설파한 『넛지』를 읽고 청와대 참모들에게 선물하기도 했다. MB 정부 때 청와대 수석을 지낸 A 씨는 "취임 직후 ‘광우병 촛불’에 호되게 쓴맛을 본 MB가 이 책에서 타개책을 찾으려 했다”고 말했다.
이쯤에서 책 한 권을 대통령에게 권하고자 한다. 『경제 철학의 전환』이다. 책이 나온 지는 1년이 넘었다. 저자는 대통령도 잘 아는 이다. 노무현 청와대의 정책실장을 지낸 변양균이다. 책에는 경제 정책을 오랫동안 다루고 고민해 온 정통 관료의 깊은 내공이 담겨있다. 단기 처방 위주인 케인스가 아니라 슘페터의 혁신을 해법으로 소환했다. 어쭙잖은 이론 대신 실제 진단과 처방이 가득 담겨 있다. 거짓말 좀 보태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수 있을 만큼 쉽다. 불평등과 양극화 해소를 위한 소득주도성장, 혁신 성장, 공정경제의 기본 줄기도 같다. 다만 속도와 방법은 좀 다르다. 더 현실적·실용적이다. 예컨대 고용 안정만큼, 고용의 유연성을 중시했다. 노동의 자유가 자본의 자유와 함께 가야 한다고 말한다. 주택 정책도 세금으로 두더기잡기 식은 안된다고 했다. 구체적인 숫자로 현실을 담아냈다. 5년간 286만 채의 임대주택을 지어 주거 복지를 해결하자고 썼다. 수도권 규제는 확 풀되 거기서 생긴 세입을 지방과 나누자고 했다. 주거·의료·교육·안전을 국가가 책임지면 노동 비용을 확 낮춰 기업·노동자가 윈윈할 수 있다는 독일식 모델도 소개했다. 이를 위해 부가세 5%포인트 인상과 공기업 지분 매각, 세세한 재원 조달 방안도 담았다.
대통령은 이미 읽었을 수도 있다. 노무현 청와대에서 같이 일한 문재인 대통령과 변양균의 인연은 남다르다. 2012년 변양균이 낸 『노무현의 따뜻한 경제학』엔 당시 노무현 재단 이사장이던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추천사도 썼다. 추천사엔 "변양균. (중략) 그는 날카로운 시각과 풍부한 학식을 지닌 경제학자이자 전문성과 이론을 겸비한 유능한 정통 관료입니다. 참여정부 시작부터 끝까지 노무현 대통령의 경제 정책 전반을 보좌하고 입안하고 실행한 참모입니다. (중략)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 그의 재능이 다시 우리 사회를 위해 유익하게 쓰이길 바랍니다. 그가 경제 전문가로 우리 앞에 다시 와 준 것을 환영합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대통령의 ‘독서 정치’에 막상 『경제 철학의 전환』은 빠져있다. 대통령뿐 아니라 주변 참모들도 이 책을 언급하지 않는다. 이 정부의 전직 경제부처 장관은 "책에 대해 들은 적도, 읽은 적이 없다”고 했다. 나는 이유가 몹시 궁금하다. 혹시 변양균의 해법이 이념을 넘어 좌우, 노동과 자본을 아우르는 통합을 말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기업과 노동자, 강남과 비강남을 칼로 자르듯 나누지 않아서는 아닐까. 문재인 정부에서 요직을 맡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변양균은 정부 출범 후 1년 반이 지나도록 ‘외부 인사’에 머물고 있다. 변양균은 지난해 정부 출범 직전 ‘문재인 정부의 경제 철학’을 묻는 내게 "내 입으로 할 말은 없다”며 "내가 할 얘기는 책(『경제철학의 전환』)에서 다 했으니 곧 출간될 책을 보라”고 했다. 그는 "이 정부에서 내 역할은 없을 것”이라며 "연부역강(年富力強)한 후배들이 다 알아서 잘할 것”이라고도 했다. 나는 책을 읽고 난 뒤 그의 말뜻을 알았다. 책은 변양균이 쓴 ‘대통령 전상서’였다.
독서광으로 소문난 버락 오바마는 대통령 시절 "매일 잠들기 전 한 시간씩 책을 읽었다”고 말했다. 그는 "너무 많은 정보가 오갈 때, 독서는 시간을 늦추고 통찰력을 얻게 해주며,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하게 해준다”며 "(독서가) 지난 8년간 내 안의 균형을 찾게 해줬다”고 했다. 미국 소설가 리처드 포드는 프란츠 카프카를 인용해 "책은 얼어붙은 정신의 바다를 깨는 도끼”라고 했다. 나는 변양균의 『경제철학의 전환』이야말로 정신이 번쩍 깰 날 선 도끼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의 일독을 권한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