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람과 싸워가며 밥 먹는 미래 자동차”
신종 극한 직업이나 아르바이트 안내 문구가 아니다. 국내 대부분의 전기차 충전소에서 흔히 벌어지는 상황이다. 전기차 충전소는 일반 주유소처럼 차량이나 충전기를 덮어줄 지붕이 없다. 서울(961곳)을 비롯한 전국 7351곳의 전기차 공용 충전소는 대부분 덮개가 없는 개방형 구조물이다.
충전소 7300곳…‘천재지변’에 낭패보기 일쑤
국내 전기차, ‘4만대 시대’에도 인프라 양극화
‘카본프리’ 제주, 전기차·충전기 양적 확충만
‘전기차 천국’ 제주, 1.6%만 충전소 지붕 씌워
지난달 6일 제주국제컨벤션센터 주차장. 손에 우산을 받쳐 든 한 운전자가 굵은 빗줄기 속에서 자신의 차량과 맞는 충전기를 찾느라 애를 쓰고 있었다. 그는 거센 바람에 우산이 꺾이자 비를 흠뻑 뒤집어써 가며 간신히 충전기를 꽂았다. 이날 제주에는 태풍 ‘콩레이’가 스쳐 가면서 초속 34.7m의 강풍과 시간당 23.6㎜의 폭우가 쏟아졌다.
곧이어 충전소에 도착한 한 여성 운전자는 더욱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빌린 ‘볼트’ 차량의 충전기를 이미 앞서 도착한 차량이 사용하고 있었다. 30여 분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그는 자신이 충전할 차례가 돼서도 충전기를 꺼내 들지 못했다. 장대비 속에 장시간 노출된 충전기는 물론이고 차량 내 충전구에도 빗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망설이던 운전자는 차 안에 있던 검은 비닐봉지로 손을 감싼 뒤에야 충전기를 차량에 꽂았다. 이은정(38·서울)씨는 “전기차는 감전이 되지 않는다는 말은 들었지만, 비바람 속에서 처음 충전을 하려니 두려웠다”고 말했다.
정부·업체 “감전 위험 없다”…유사 사고는 속출
하지만 전기차를 처음 접한 운전자들은 “비나 눈이 올 때 마음 놓고 충전하는 게 쉽지만은 않다”고 입을 모은다. 전기장치에 물이 들어가는 데 대한 심리적 공포가 큰 데다 유사한 사고도 끊이지 않고 있어서다. 제주에서는 지난 8월 도청 주차장에 설치된 충전기에서 빗물 등 이물질 유입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폭발 사고가 발생했다. 지난 4월에는 충북 청주에서 감전으로 추정되는 충전기 사고가 난 데 이어 대구(7월) 등에서도 사고 사례가 접수됐다.
9월 말 현재 공용 충전기는 서울 961대를 비롯해 경기 1468대, 부산 294대, 대전 126대, 광주 220대 등이 설치돼 있다. 현재 운행 중인 서울(8105대), 경기(5235대), 부산(1268대), 대전(1031대), 광주(1134대) 등의 전기차 보급상황에 비해 크게 부족한 규모다. 서울의 경우 서울시가 관리하는 공용 충전기 16대 중 지붕을 갖춘 곳은 단 4기에 불과하다.
충전기를 조작하는 액정표시장치(LCD)가 햇볕에 반사돼 잘 보이지 않는 것도 문제다. 대부분의 LCD조작창이 남향이나 서향으로 설치된 탓에 해가 뜬 낮에는 숫자를 식별하기 어렵다. 택시기사 방광익(65·제주)씨는 “해만 떠도 충전기 LCD창을 보기 힘든 데다 올해처럼 더울 때는 뙤약볕 아래서 충전하는 것도 큰 곤욕”이라고 말했다.
‘햇볕 노출’ LCD창…“낮엔 글씨조차 안 보여”
지속적인 충전기 확충에도 불구하고 유명 관광지나 호텔 등지에서의 ‘충전 싸움’도 여전하다. 대부분 여행지로 출발하기 전인 오전 시간대에 충전하기 위해 줄을 서는 운전자가 많아서다. 이 과정에서 일부 부부나 연인들은 “시간도 없는데, 왜 전기차를 빌렸느냐”며 말다툼을 벌이기도 한다. 한 곳에 2~3대씩 충전기가 있는 경우 1대 정도 고장이 나면 수리가 늦어지는 사례도 많다는 게 운전자들의 지적이다. 김창호(51·부산)씨는 “제주의 충전소가 많이 늘어난 것을 확인하고 렌트했는데 외지 관광객이나 악천후를 고려한 인프라는 여전히 부족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제주=최경호·최충일 기자, 박형수 기자 choi.kyeongh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