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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일본, 우리의 적인가

중앙일보

입력 2018.11.01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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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

공교롭게 대법원이 강제징용 판결을 하는 날 이한동 전 총리의 저서가 배달됐다. 거기엔 1973년 도쿄에서의 DJ(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우시로쿠 도라오 주한 일본대사가 DJ 자택을 방문한 대목이 나온다. 당시 입회 검사가 이 전 총리였다고 한다.
 
▶우시로쿠 대사=“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의 명을 받아 일본 정부를 대신해 김대중 선생의 안전을 확인코자 방문했다.”
 
▶DJ=“다나카 총리와 일본 정부에 감사하다. 다나카 총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이후 최초의 평민 재상으로서 일본 국민의 사랑을 받는 분이고, 나도 존경한다.”
 
▶우시로쿠 대사=“김대중 선생은 한국의 다나카 가쿠에이가 아닌가.”


납치로 한·일 관계는 크게 엉클어졌다. 그걸 풀겠다고 나선 이들 중 한 명이 총리이던 JP(김종필)다. “내가 도쿄에 가서 다나카 총리와 만나 유감의 뜻을 표시하겠다. 총리가 국가를 대표해 유감 표시하는 게 최고의 해결책 아닌가. 나는 이완용이란 말을 들어도 좋다.”(『남산의 부장들』)
 
JP는 이전에도 이완용을 ‘자처’했었다. 65년 한일청구권협정의 토대가 된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과의 담판 때다. JP는 “우리가 만난 이상은 당신은 일본의 고무라 주타로가 돼라. 난 이완용이 되겠다”고 했다. 고무라 주타로는 러일전쟁 때 외상으로, 당시 체결한 포츠머스 조약에 대한 반발로 일본에서 폭동이 났었다.
 
포항제철(포스코) 얘기도 하지 않을 수 없겠다. 한일청구권협정 자금을 전용해 세웠다는 비판을 받곤 했다. TJ(박태준)는 1987년 작고한 이나야마 요시히로 신일본제철 회장을 추모하며 “‘일본이 수십 년 동안 한국을 지배하면서 한국민에게 끼친 손실을 보상하는 의미에서도 협력하는 게 마땅하다’며 포철 건설에 필요한 자본과 기술을 지원했다”고 썼다.
 
옛 얘기다. 한·일 관계가 ‘과거사’, 특히 일제 강점기 기억으로 압도되는 요즘 듣기 어려울 얘기이기도 하다. 어느덧 ‘빨갱이’ ‘꼴보수’보다 ‘친일파’란 비난이 더 무서운 세상이 됐다. 지일파도 친일파로 등치되곤 한다. 최근 정부·대법원 동향에 비판적인 한 전문가는 “가족들이 ‘제발 공개 발언을 하지 말라’고 한다”고 했다. 겁먹는 게다. ‘침묵의 나선’이다. 우리의 과거사 기억은 그 사이 더 선별적이 된다. 조선 왕궁을 침입한 청의 오만방자함이나 중공군의 6·25 참전은 좀처럼 거론되지 않는다. 이래서야 국가 이익을 제대로 계산해 낼 수 있겠나. 일본의 옹졸함을 탓하더라도 나, 당신, 우리는 냉정해져야 한다. 그리고 물어야 한다. 현재의 일본이 우리의 적인가.
 
고정애 중앙SUNDAY 정치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