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건, 임종석 먼저 면담…남북경협 속도조절 요구 가능성

중앙일보

입력 2018.10.30 00:03

수정 2018.10.30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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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오른쪽)이 29일 청와대에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를 만났다. 청와대는 ’면담에서 한반도 비핵화, 2차 북·미 정상회담 등에 대해 대화를 했다“고 밝혔다. [사진 청와대]

방한 중인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가 29일 청와대를 찾아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공개로 만났다. 청와대는 이날 “미국 측에서 임 실장과의 만남을 요청해 성사됐다”며 “면담에서 임 실장은 ‘북·미 회담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달라’고 당부했고, 비건 대표는 한국 정부의 지원을 요청했다”고 밝혔다.
 
비건 대표의 임 실장 예방은 이례적이다. 미국의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가 한국의 대통령 비서실장과 단독 면담을 하는 일은 전례를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임 실장이 남북 공동선언 이행추진위원장을 맡고 있고, 남북 공동선언에 ‘완전한 비핵화’가 담겨 있다 해도 이례적이긴 마찬가지다. 비핵화는 외교안보 라인이 전담해 왔고, 청와대에선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중심이다.

실무 채널로는 소통 곤란한 사안
대북정책 주도 임 실장에게
직접 미국 입장 전달 의도인 듯
강경화·폼페이오 통화도 주목

청와대에 따르면 당초 비건 대표는 30일 정 실장과 만날 계획이었다. 그런데 미측에서 이 자리에 임 실장도 함께 나와 줬으면 한다는 의향을 전달해 왔다. 그러나 임 실장의 일정상 30일 만남이 어려워 결국 29일 비건 대표와 임 실장이 단독 면담을 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비건 대표는 정 실장과는 예정대로 30일 만난다. 이 같은 설명으로 보면 비건 대표의 주요 방한 목적에는 결국 임 실장 면담이 포함돼 있었던 것으로 관측된다. 특히 비건 대표는 지난 21~23일 미국에서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만났던 만큼 불과 1주일 만에 서울에 직접 온 건 외교부가 아닌 청와대 예방 때문이었다는 추론이 가능해진다.
 

29일 외교부에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가 들고 있던 한반도 지도. [우상조 기자]

청와대는 29일 면담에서 한반도 비핵화 및 평화 정착, 2차 북·미 회담 진행 사안에 대해 ‘심도 깊은 대화’가 오갔다고 밝혔다. 청와대 발표에는 빠져 있지만 남북 협력 사업에 대한 논의도 오갔을 것이라는 게 외교가의 지배적인 관측이다. 정부가 추진하는 남북 경협에 대해 ‘속도 조절’을 요구했을 가능성이 거론된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국무부와 외교부 채널이 잘 돌아가는데도 비건 대표가 임 실장을 만난 배경은 한국이 공개적으로 제재 완화를 국제사회에 요구하는 점 등으로 미뤄 그간의 관료 채널, 혹은 실무자 채널로는 이야기해도 뭔가 명료하게 전달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대북정책을 주도하는 것으로 알려진 임 실장을 만나 직접 미국 입장을 전달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청와대는 비건 대표가 임 실장을 만나 한국의 지원을 요청했다고 밝혔는데, 북·미 간 실무협상 등이 가동되지 않는 가운데 한국이 역할을 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풀이된다.


비건 대표가 서울에서 한국 정부 인사들을 접촉하는 가운데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29일 밤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통화했다. 한국 기업의 대이란 제재 예외인정 문제 등 한·미 간 양자 현안이 주로 논의됐다고 한다.
 
비건 대표는 30일 조명균 통일부 장관도 만난다. 통일부 역시 미 국무부와 직접적으로 업무 협의를 하는 기관은 아니다. 청와대-통일부로 이어지는 비건 대표의 동선은 그간 국무부가 강조해 온 ‘남북관계 개선이 북한 비핵화와 별개로 진전돼선 안 된다’는 메시지를 보다 직접적으로 전달하려는 의도라는 해석이 나온다.
 
이와 관련, 현재 한·미 간엔 정부가 속도를 내고 있는 남북 간 철도·도로 연결 및 현대화 사업에 대한 미국 측 관심이 큰 상황이다. 30일 비건 대표와 조명균 장관의 면담에서 이에 대한 협의가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조 장관은 29일 국회에서 열린 외교통일위원회의 통일부 국정감사에서 10월 하순 진행할 예정이던 경의선 철도 남북 공동조사가 지연되고 있는 이유에 대해 “미국 측과 저희(한국)가 부분적으로 약간 생각이 다른 부분이 있다”고 밝혔다. 조 장관은 “생각이 다른 부분”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철도 공동조사를 위해 한·미가 협의하고 있지만 아직 최종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유지혜·강태화·권유진 기자 wisepe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