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한 친구를 만났더니 기부를 요청받았는데 고민이란다. 그는 자기가 기부를 할 정도로 착한 사람은 아니라는 고백부터 시작한다. 넉넉지 않은 형편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착한 사람이 아닌데 어떻게 기부를 하냐며 당황해한다. 먼저 착한 사람이 되어야만 기부를 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이 친구도 결국 착한 일을 못 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이기적인 사람도 때로는 이타적인 행동을 원해
순수 이타성에 대한 완벽주의 멍에를 걷어내자
충동 쇼핑을 바라보는 시선만큼이나 충동 기부나 충동 봉사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다. 순수한 마음으로 돕지 않는다면 아예 돕지 않는 것이 좋다는 냉엄한 소리도 들려온다. 네가 언제부터 착한 사람이었다고? 네 자신의 기분과 만족을 위해서 남을 돕는 것은 위선이야! 의심과 조롱의 목소리가 착한 마음을 훼방 놓는다. 자기 자신을 위한 어떤 이기적 의도가 없고, 남을 돕는 행위를 통해 자신에게 돌아오는 어떤 형태의 이득도 없어야 한다는 ‘순수 이타성’에 대한 고상하고 도덕적인 기준이 늘 마지막 순간에 착한 마음의 발목을 잡는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종교적 가르침도 마음의 부담이다. 자신의 선행을 알리지 말라는 은밀한 구제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기의 선행을 주변 사람들에게 ‘은밀하게’ 공개하고 싶은 작은 이기심이 그렇게도 비난받을 일일까 하는 원망을 지울 수가 없다. 선행이 공개적으로 인정받았을 때 오히려 이타적 행위가 증가한다는 연구 결과는 은밀한 선행, 익명 기부, 그리고 자기희생을 강조하는 숭고한 가르침 앞에서 여지없이 ‘속된 생각’이 되고 만다. 남을 돕고 나서 내게도 좋은 일이 생긴다면 좋은 일이 아닌가? 이타적 행위를 통해 자기 자신이 행복해진다면 그것 역시 좋지 아니한가? 자기만족을 위해 남을 도와서는 안 된다는 순수 이타성의 기준을 도대체 얼마나 강하게 적용해야만 할까? 우리 안의 이타성을 깨우기 위해 던져봐야 하는 질문이다.
최근에 서울대학교 행복연구센터에서 진행하고 있는 연구에 따르면, 순수 이타성에 대한 기준을 엄격하게 가지고 있는 사람일수록 개인과 기업의 이타적 행위를 덜 이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고 한다. 뭔가 숨겨진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의심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순수함을 강조하는 사람일수록 이타적 행위를 한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칭찬해주려는 시도에도 반대한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것이다. 더 흥미로운 점은, 이들 자신이 평소에 남을 돕는 행위를 더 많이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순수해야만 이타적이라는 높은 기준을 가진 사람들이 실제로 남을 많이 돕고 있다면 그들의 가르침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을 텐데, 오히려 남을 돕지 않는다니 이상한 노릇이다.
순수성은 옳다. 순수성이 진정성을 의미할 때는 그렇다. 우리는 늘 우리 자신이 가진 동기의 순수성을 점검해야 한다. 그러나 순수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오히려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다. 순수 이타성에 대한 과도한 집착은 오직 착한 사람들만이 착한 일을 하게 되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고, 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숨겨진 의도가 있는 사람으로 의심하게 만들 뿐 아니라, 우리가 아직 착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 안의 이타성을 억압하는 역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이기적인 사람도 때로는 이타적인 행동을 하고 싶다. 경제적 이득을 추구하는 기업도 때로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고 싶어 한다. 우리 모두에게서 순수 이타성에 대한 완벽주의의 멍에를 걷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때를 빼고 목욕탕에 가려는 내 친구처럼 목욕탕에 안 가게 될지 모른다.
최인철 서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