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쪽은 ‘빅배스’가 일상화돼 있다. 성공 사례 중 최고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다. DJ의 “금고가 비었습디다”는 당시 국민 감정과 잘 어우러져 톡톡히 효과를 봤다. 이 한마디로 경제 과오는 모두 지난 정부 것이 됐다. 재벌 개혁, 노동 개혁이 탄력을 받았다. 하지만 ‘금고가 비었다’는 반만 맞았다. 당시 한국의 금고, 곧 재정은 세계에서 가장 든든했다. 빈 것은 외환 금고였다. 빈 외환 금고를 1년여 만에 다시 채울 수 있었던 것도 튼튼한 재정 금고 덕이었다. 사실을 적절히 섞어 짠 촌철살인, DJ의 빅배스가 성공한 이유다. 남 탓, 전임자 탓도 세련미가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남 탓이 아무리 좋다지만
좀 세련되게 할 수는 없나
우선 과잉 유동성 문제다. 뭉칫돈 때문에 집값이 오른 건 일부 맞다. 하지만 그걸 알고도 방치한 게 지금 정부다. 뭉칫돈의 물꼬를 터 줄 변변한 수급 대책도, 금융·경제 대책도 내놓지 못했다. 취임 후 1년 반을 ‘투기꾼 탓’만 했다. 그래 놓고 이제 와 금리 탓, 뭉칫돈 타령이니 누가 납득하겠나. 사실관계도 틀렸다. 금리만 올린다고 집값이 잡히나. 되레 1500조 빚에 눌린 애꿎은 서민 가계만 힘들어질 수 있다. 뭉칫돈이 저절로 줄어들 리도 없다. 돈은 자가 증식의 속성이 있다. 돈 되는 곳으로 몰려다닌다. 뭉칫돈이 한 곳에 몰리면 백발백중, 사고를 친다. 적절히 투자할 곳을 만들어 쏠림의 위험을 줄이는 게 경제 정책의 기본이다. 그러려면 투자 물꼬를 터주고 기업 분위기를 살려야 하는데, 그건 안 한다. 주식시장은 종합소득세·양도소득세, 대주주 요건 강화 등으로 꽁꽁 묶어놨다. 비트코인이라도 해볼라치면 그건 불법이란다. 뭉칫돈이 부동산으로 쏠려 사고를 안 치면 그게 비정상이다.
둘째, 그렇게 저금리가 불만이면 진작 한은 총재를 갈아치워야 했다. 지난 정부 ‘저금리 적폐’의 집행자가 바로 한은 총재 아닌가. 물러나겠다는 총재를 연임시켜 놓고 이제 와 ‘네 탓’은 뭔가. 셋째, 정부 내 조율을 거쳤는지도 의심스럽다. 지난 8월 말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미국이 금리를 올리더라도 우리는 우리에게 맞는 정책을 써야 한다”며 금리 인하 쪽에 무게를 뒀다. 이 발언으로 그날(21일) 국고채 금리가 급락하기도 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경제 체력이 바닥이고 고용 쇼크까지 겹쳤는데 지금 금리를 올려 어쩌자는 건가”라며 볼멘소리를 했다.
뜬금없는 금리 탓에 이래저래 한은만 곤란하게 됐다. 다음 주 금리를 올리면 ‘집값 급등의 주범’임을 자인하는 꼴이요, 동결하면 두고두고 공격의 빌미를 줄 판이다. 얀 베르너 뮐러 교수는 “남 탓, 과거 집권 세력 탓”을 포퓰리즘의 특성으로 꼽으면서 “남 탓이야말로 대상이 고갈되지 않는 소재”라고 했다. 그래, 무오류의 이념으로 무장된 이 정부 정책에 무슨 잘못과 실수가 있겠나. 네 탓이다, 금리.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