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지인들로부터 몇 차례 들은 질문인데요. 그러고 보니 고속버스나 항공기를 탈 때는 안전벨트를 신경 쓰지만, 시속 300㎞로 달리는 KTX(고속열차)를 타면서는 안전벨트를 찾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저 원래 없는 것에 익숙한 탓인 듯도 하구요. 사실 우리나라는 물론 외국 열차에도 안전벨트는 대부분 없습니다. 물론 대형 열차사고가 나면 안전벨트 설치를 놓고 논란이 일기도 하는데요.
대부분 열차 안전벨트 없어
급제동거리 길어 충격 감소
충돌· 탈선 때 압사 더 많아
벨트 매면 사망자 6배 증가
전문가들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선 열차의 제동거리는 자동차에 비해 무척 깁니다. 도로가 마른 상태를 기준으로 승용차는 시속 50㎞ 때 브레이크를 밟으면 제동거리가 10m가량 됩니다. 버스는 17m로 좀 더 나간 뒤 섭니다. 타이어 마모 상태도 영향을 미쳐서 새 타이어냐 오래된 타이어냐에 따라서 시속 100㎞ 주행 시 제동거리는 47~70m가량으로 차이가 나는데요. 어쨌거나 이 정도로 급제동하면 승객들에게 미치는 영향은 상당합니다. 안전벨트를 안 하고 있을 경우 몸이 붕 뜨거나 앞 좌석에 머리를 세게 부딪히는 등 심한 물리적 충격을 받아 숨지거나 크게 다칠 수 있다는 건데요.
또 한 가지는 탈선 및 화재사고 때 안전벨트 착용이 오히려 더 큰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겁니다. 열차는 충돌하거나 탈선할 때 승객이 열차 밖으로 튕겨 나가는 사례보다 차체가 찌그러지면서 압사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건데요. 이때 안전벨트를 하고 있다면 신속하게 탈출하는 데 어려움이 크다는 설명입니다.
이와 관련해 미국과 영국에서 실제로 열차의 안전벨트가 승객 안전에 도움이 되는지를 실험한 적이 있는데요. 먼저 2002년 미국의 연방철도국(FRA·Federal Railroad Administration)에선 정지한 기관차에 여객 차량이 시속 48㎞로 충돌할 때 안전벨트를 착용한 인형과 착용하지 않은 인형의 부위별 부상 위험도를 분석했습니다. 그런데 결과는 안전벨트를 착용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가 전반적으로 차이가 크지 않았다고 합니다. 특히 두 경우 모두 상해 기준치를 초과하지 않았고, 오히려 안전벨트를 맨 경우 목 부위에 가해지는 충격이 더 컸다고 하네요.
RSSB에서는 이 충돌 실험 외에도 1996년~2004년 사망자가 발생한 영국 내 중대철도 사고 6건에 대한 분석도 했는데요. 사고 시 승객이 열차 밖으로 튕겨 나가는 걸 방지하는 목적으로 안전벨트가 어떤 효과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6건의 사고에서 열차 밖으로 튕겨 나가 사망한 사람은 11명이었고, 열차 내부 손상으로 인한 사망자는 14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열차가 찌그러지고 부서지면서 유사시 승객이 몸을 피해 살 수 있는 공간이 아예 없어진 좌석이 220석이었다고 하는데요.
이런 요소를 넣어서 계산해보면 만약 모든 차량에서 모든 승객이 안전벨트를 착용했다고 가정할 경우 사망자는 무려 88명으로 늘어난다는 결론이 나왔다고 합니다. 안전벨트를 했다면 열차 밖으로 튕겨 나가 숨지는 경우는 줄일 수 있겠지만 반대로 제때 탈출하지 못해 열차 내에서 압사하는 승객이 6배 이상 증가할 거란 의미입니다.
이 같은 이유로 전 세계적으로 열차에는 안전벨트를 설치하지 않는다는 건데요. 어찌 보면 더 큰 피해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상대적으로 적은 피해는 감수하겠다는 걸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유사시 단 한 명의 소중한 생명이라도 더 보호하려는 노력은 계속돼야 할 텐데요. 그래서 전문가들은 효과가 모호한 안전벨트보다는 열차 내 충격완화 설비를 보강하고, 비상탈출을 위한 구조 개선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권고합니다. 이런 연구와 노력이 합쳐져 보다 안전한 철도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강갑생 교통전문기자 kksk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