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 시대의 ‘민족’이라니. 그게 도대체 뭐라고 세대를 이어가며 지켜내려고 그리 안간힘을 쓴단 말인가. 개인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이 가능한 요즘 같은 시대에 말이다. 조선적 자이니치는 일본에 머물지만, 그곳의 일부가 되지 못한다. 전쟁이 끝나고 일본에 남겨진 조선인 중 상당수는 남북으로 분단된 조국을 거부하고 ‘조선적’으로 남을 것을 선택했다. 그들에게 조선 국적과 한민족이라는 정체성은 일본 사회의 차별을 견뎌내는 공동체의 다른 이름이었다. 실제로 아베 신조 정부는 조선학교 고교 교육 무상화 지원 배제 등 차별을 하고 있고, 최근 오사카 고등재판소(고등법원)도 고교 무상화 차별 정책에 손을 들어 주는 판결을 했다.
일본에 살아도 일본의 일부 못돼
차별을 견디면서도 명맥 지켜내
찢겨진 민족이 한국사회의 모순
세계화 시대에 민족을 고민해야
그들에게 민족은 분단된 남북이나 한민족과 같은 거창한 것이 아닌 그냥 지금 옆에 앉아 있는 친구·가족·이웃인 듯했다. 일본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온 아버지 세대에 대한 존경심과 사랑, 조선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며 버텨온 친구들에 대한 애틋함, 그리고 조선인 출신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야만 하는 자녀들에 대한 책임감 등 뒤섞인 감정이 바로 이들이 말하는 민족 정체성이었다.
하지만 조선적 자이니치들의 삶이 말해주듯 쉽사리 민족을 폐기하기도 어렵다. 누군가는 민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겨우 삶을 유지하며, 무엇보다도 민족이라는 이름의 상상 공동체가 여전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분단된 한반도에서 민족의 평화로운 공존은 부정할 수 없는 미래의 지향이자, 찢긴 민족이야말로 현재 한국 사회의 근원적 모순이다. 한반도의 맥락에서 민족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말이다. 오히려 지금껏 어떤 맥락에서 민족이 강조됐으며, 어떤 민족 정체성이 생산됐는지를 살핌으로써 세계화 시대에 걸맞은 민족의 자리를 고민하려는 자세가 요구된다.
자이니치들이 일본 사회의 차별을 견뎌내기 위한 소수자의 정체성으로 민족을 호명했다면, 분단된 한반도에서 민족 정체성은 과거 원형 복원으로서 미래를 상상하는 것이다. 남북 모두 온갖 사회문제를 봉합할 목적에서 규율적 정체성으로 민족을 강조해왔던 것도 잊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이런 형태의 민족은 세계화 시대의 평화를 모색해야만 하는 작금의 한반도 상황과는 동떨어져 있다. 원형으로서 민족을 소환했던 최근 남북 교류 이벤트가 시민들에게 예전만큼의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 이유를 되새겨 봄 직하다.
한반도 대전환의 시기에 민족이라는 말이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남북은 한민족”이라는 선험적인 주장들이 쏟아지고, 남북 교류와 경제협력을 민족의 혈맥 복원이라는 당위로 접근하기도 한다. 역으로 민족 자체를 부정하며 철저하게 경제적 가치로 북한을 타자화하는 이들도 있다. 둘 다 현실적이지도, 그렇다고 미래지향적 대안도 아니다. 분단의 맥락에서 민족 문제를 인정하면서도 평화로운 한반도에서 ‘새로운 민족’에 대한 좀 더 치열한 고민이 필요한 이유다. 원칙은 있다. 바로 세계화 시대에 민족의 자리는 타자를 배제하거나 내부를 규율하는 것이 아닌 분단과 신자유주의로 파편화된 남북 시민들의 삶의 회복, 그리고 분열과 적대로 파괴된 모두의 공동체 복원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마침 오늘은 개천절이다.
김성경 북한대학원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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