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 누가 프란치스코 교황을 흔드는가…음모론 불붙는 ‘가톨릭 보·혁 갈등’
12억 가톨릭 신도의 정신적 지주이자 바티칸시국의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82)에 대한 공개 퇴진 요구가 메가톤급 파문을 부르고 있다. 가톨릭 사제의 성 학대(sexual abuse) 문제에서 촉발된 이슈가 가톨릭 개혁을 둘러싼 보수vs혁신 갈등을 드러내며 상대를 겨냥한 극한의 음모론으로 번지는 양상이다.
문제의 발단은 지난 26일(현지시간) 카를로 마리아 비가노(77) 대주교가 가톨릭 보수 매체들에 보낸 11쪽짜리 편지다. 이 공개편지는 지난달 잇단 성 학대 의혹으로 물러난 시어도어 매캐릭 전 추기경(2001~2006년 워싱턴 대교구장)의 비위를 프란치스코 교황이 알고 있었음에도 이를 은폐하려 했다는 고발을 담았다. 비가노 대주교는 “교황은 최소 2013년 6월 23일부터 매캐릭이 연쇄 가해자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면서 교황의 즉각 퇴위를 요구했다. 교황은 2013년 3월 교황으로 선출됐으며 비가노 대주교는 당시 주미 교황청 대사였다.
현직 비가노 대주교 '교황 퇴진 요구' 일파만파
"프란치스코 교황이 '성 학대' 가해자 은폐했다"
진보파 "쿠데타 시도" 보수파 "동성애 옹호 안돼"
실제로 비가노의 편지는 파격적인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취약하다고 뉴욕타임스(NYT) 등 주요 외신은 분석한다. 예컨대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매캐릭의 비위를 알고 그에게 속죄와 근신 처분을 명했다고 비가노는 주장한다. 하지만 그런 공식 기록이 없고 매캐릭은 미사를 집전하는 등 공적 활동을 계속했으며 그의 사표를 수리한 것은 현 교황이다. 오히려 비가노야말로 다른 대주교 관련 성추행 수사에 압력을 행사해 진실을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편지가 공개된 시점도 의심을 샀다. 당시 교황은 아일랜드를 39년 만에 방문해 성학대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사죄하는 메시지를 발표한 후 귀국하는 길이었다. 아동 성폭력 문제를 거듭 사과하고 재발 방지를 다짐한 교황의 메시지보다 그의 '이중성'을 주장하는 비가노의 편지가 언론의 이목을 사로잡은 것이다. 이에 대해 편지를 공동 작성한 이탈리아 저널리스트 마르코 토사티는 "보수파의 음모 따윈 없다"면서 언론 공개 시점은 "우연의 일치일 뿐"라고 해명했다.
진보파들은 비가노의 편지가 오랫동안 획책되어 온 '프란치스코 축출' 계획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본다. 마시모 파지올리 빌라노바대 교수(가톨릭역사·신학)는 워싱턴포스트(WP) 인터뷰에서 이번 사태를 “쿠데타 작전"이라고 표현하면서 ”비가노 개인의 필요성과 교황 반대파의 요구가 극적으로 만난 결과“라고 분석했다. 뉴욕 포드햄 대학의 데이비드 깁슨 종교문화센터장도 “보수파에 의한, 다음 콘클라베(교황 선출 절차)의 캠페인이 시작된 것”이라고 일갈했다.
이런 시각에선 교황이 취임 이래 성소수자들에 대해 관용적인 모습을 보여온 것도 의혹의 대상이 된다. 예컨대 교황은 취임 초기였던 2013년 7월 기자들과의 문답에서 “만일 동성애자가 선한 의지를 갖고 신을 찾는다면 내가 어떻게 그를 심판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게이 로비'와 관련해서도 "진짜 문제는 동성애 성향이 있고 없고가 아니라 이런 성향을 가진 욕심많은 사람들이 다양하게 로비를 펼치고 있다는 점"이라고 답했다. 음모론적 시각에서라면 이런 유보적 태도는 교황이 이미 게이 로비에 휘둘려 있다는 방증이다.
이들은 교황이 동성애·이혼 등 문제에 대해 포용적 태도를 보이는 것이 교리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극단적인 일부는 “우리들의 교황은 여전히 베네딕토 16세”라는 주장까지 펼친다. 이런 ‘갈라치기’에 불편함을 느꼈는지 지난 3월엔 명예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이례적으로 공개 서한을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의 신학적인 깊이가 부족하다는 일각의 주장은 '어리석은 편견'일 뿐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퇴위 요구에 대한 직접 반응도 없다. 다만 이날 이탈리아 언론들은 교황의 측근을 인용해, 교황이 비가노의 의혹 제기에 "괴로워하고 있지만 퇴위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가톨릭계는 이번 사태를 통해 프란치스코 교황이 추구해온 개혁적 가치가 다시금 "전투에 휘말렸다"(BBC)고 보고 있다. 이 전투란 세속의 각종 이슈(낙태, 이혼·재혼, 동성애 등)에 대응하는 가톨릭의 미래를 둘러싼 시각의 충돌이다. 지난 2014년 가톨릭 교회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주교 시노드)는 이 같은 교황파와 반대파가 맞붙은 대표적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 전면화된 보·혁 갈등이 '비가노의 편지'를 계기로 다시 수면 위로 부상했다는 분석이다.
다만 이 과정에서 애초 출발점이었던 '가톨릭 사제의 성 학대'와 아동 인권 이슈가 희석화되는 데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성 학대라는 범죄 행위에서 동성애 포용 여부로 초점을 이탈시키는 것 자체가 잘못된 프레임의 결과라는 지적이다. 익명을 요구한 가톨릭 신학자는 본지에 “일각에서 ‘게이 로비’ 등의 자극적 용어로 본질을 호도하는 걸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