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평양을 방문한 건 지난 10~17일. 제4회 아리스포츠컵 축구대회 취재단의 일원으로다. 첫 평양 방문이었다. 파주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에서 북측이 내준 대형 버스로 갈아타고 평양~개성 고속도로를 3시간여 달리자 우뚝 솟은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이 모습을 드러냈다.
김 위원장 집권 7년 … 평양을 가다
김책공대 교수 등에 무상 아파트
미래거리는 ‘북한판 판교’로 불려
대북제재 속에도 대규모 건설 붐
60~70층 빌딩, 스카이라인 바꿔
확 뚫린 대로변 양편에 우뚝 선 알록달록 형형색색으로 채색된 아파트와 초현대식 고층 건물들이 단번에 방문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자세히 보니 지은 지 오래된 아파트들엔 주홍, 분홍, 코발트, 비취, 그린 같은 형광색상의 페인트를 입혀 새 단장을 했고, 최근 건설된 신형 아파트와 60~70층짜리 초고층 빌딩들은 유선형이나 타원형 건축기법을 써 세련미를 더했다. 미래과학자거리, 여명거리 등 김정은 국무위원장 집권 후 형성된 초고층 아파트 단지들이 평양 시내의 명물로 떠오르면서 스카이라인을 바꿔놓고 있었다.
2015년 건설된 미래과학자거리의 아파트도 김책공대 교수와 연구원 등 과학자들에게 무상 분양됐다. 미래과학자거리는 북한의 과학자 중시 정책의 상징이다. 레지던스 은하 타워, 미래과학자거리 트윈 타워 등이 잇따라 완공돼 하나의 타운을 형성하고 있고, 단지 내에 상점들이 입주해 있어 편리하게 돼 있다. ‘북한판 판교’라 불리는 이유다.
유례없는 고강도의 경제 제재를 받고 있는 북한의 수도에서 이처럼 대규모 건설 붐이 일고 있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북측 안내원에게 “대규모 건설사업을 하려면 자재 등을 수입해야 할 텐데 제재의 영향을 받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자재와 기술이 100% 국산화돼서 제재와는 관련이 없다”는 답이 되돌아왔다. 또 다른 안내원은 “지금 제재가 있다고 하지만 인민들이 크게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은 이렇다.
“고난의 행군 때는 평양에도 배급이 끊기고, 전기 공급이 제대로 안 돼서 열차가 다니지 못할 정도로 어려웠다. 그때 자력갱생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또 재래식 무기론 안 된다, 핵을 개발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미국도 우리가 핵을 갖고 있으니까 인정하고 대접해주고 있지 않은가.”
안내원이 안내하는 곳만 제한적으로 볼 수 있을 뿐 일반 주민들과는 접촉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부 사정을 속속들이 볼 수는 없었지만 6·12 북미 정상회담 이후 형성된 자신감의 한 단면을 보는 듯했다. 이와 관련, 정부 당국자는 “북한이 표면적으로는 대북 제재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있는 듯한 모양새지만 최근 외환보유고가 줄어드는 등 제재가 장기화하면서 그 효과도 가시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옥류관에 이은 평양의 신흥 명물이라는 대동강수산물식당에서도 달라진 평양의 모습이 보였다. 지난달 문을 연 이 식당은 1층에 철갑상어, 연어, 대게, 털게 등이 담긴 대형 수조가 여럿 있고 2, 3층은 1500석 규모의 식당을 갖추고 있다. 수산물과 식재료를 파는 2층의 마트에서는 일본과 유럽 등지에서 수입해온 간장, 식초, 마요네즈, 참기름, 캐비어 같은 고급 식재료가 판매되고 있었다. 가격표를 보니 일제 참기름이 1077원, 이탈리아산 비인코 식초는 700원이다. 북한 노동자의 평균 월급이 4000원가량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고가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건, 북한 제품의 포장기술과 디자인. 훈제 햄이나 소시지, 수산물들이 진공 포장돼 있었고 과즙을 함유한 다양한 탄산단물(탄산 주스) 캔 제품이 진열돼 있었다. 10년 만에 평양을 방문한 동료 기자는 “포장기술과 디자인이 눈에 띄게 향상됐다”며 놀라워했다. “국산화 노력의 결실”이라고 북측 안내원은 설명한다.
경제 제재 속에서도 국산화에 어느 정도 실적을 낼 수 있었던 것은 김정은 위원장의 과학중시, 과학인 우대 정책에 기인한다는 게 북측 인사들의 공통적인 얘기다. 북측 안내원 김 모 씨는 “과학자들에겐 고급 살림집을 우선적으로 무상 제공하고 과학자 전용 상점이 있어서 생필품도 싸게 살 수 있다”며 “그러니 다른 걱정 없이 과학 기술 연구에만 열중할 수 있다”고 했다.
핵, 경제 병진 정책을 표방한 김 위원장은 지난해 6차 핵실험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로 핵 무력을 완성,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4·27 남북, 6·12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비핵화를 약속한 북한은 지금 초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비핵화 샅바 싸움을 벌이고 있다. 그가 공언한 대로 핵을 내려놓고 과감한 경제 개혁 개방으로 나설지 그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진다.
평양=이정민 기자 lee.jungm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