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사진=띵굴시장·마르쉐@·골목시장·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은곡도마·마미스팟
최근 여성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는 '마켓(market)'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시장·마트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지방의 ‘5일장’과 비슷하다. 기획자에 의해 장소와 날짜가 정해지면 미리 판매를 신청한 셀러(판매자)들이 공들여 만든 음식이며 물건을 챙겨 나와 판매한다. 다른 점은 5일장이 같은 장소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는 데 반해, 마켓은 장소도 시간도 정해져 있지 않다는 점이다.
비정기적으로 열리지만 한 번 열릴 때마다 적게는 하루 5000명, 많게는 2만~3만명이 모일 만큼 집객파워가 대단하다. 모이는 사람 대부분은 20~40대를 중심으로 한 여성이다. 이는 취급하는 상품의 특성 때문이다. 이름난 마켓일수록 음식·주방·리빙 등 라이프스타일 관련 상품들을 주로 다룬다. 생산규모는 작지만 공들여 직접 만들거나 셀러의 취향에 맞춰 구성한 소품, 건강한 먹거리, 감각적인 디자인 제품이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2000년대 초·중반 유행했던 중고품 위주의 플리마켓(벼룩시장)과도 결이 다르다. 때문에 요즘 사용하는 ‘마켓’에는 '물건을 사고 파는 장소'라는 사전적 의미 대신, '라이프스타일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상거래 장소 또는 행사'란 의미가 더 강하다.
대형마트·백화점 등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물건들을 다룬다는 점도 마켓으로 사람이 몰리는 이유다. 4살 아들을 둔 주부 신아름(34)씨는 마켓 마니아다. 주로 소스나 간식, 아기용품을 사는데 마켓에서만 볼 수 있는 음식 브랜드인 '말랭이여사' '메종드율' '시골여자의 바른먹거리'를 즐겨 찾는다. 신씨는 "다른 데선 볼 수 없는 믿을 만한 먹거리와 재미있고 실용적인 브랜드가 많다"며 "마켓이 열리는 장소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 나들이겸 자주 다녀온다"고 말했다.
최근 가장 인기 있는 마켓은 ‘띵굴시장’ ‘마켓움’ ‘보부상 마켓’이 대표적이다. 띵굴시장과 마켓움은 개인 기획자가, 보부상 마켓은 상인 중심으로 운영된다. 이밖에 농부가 재배한 농산물을 직접 가져와 파는 '마르쉐@', 양평 지역 거주 예술가들이 모이는 '문호리 리버마켓', 제주도 플레이스 캠프 제주 호텔이 주최하는 '골목시장(제주)'에도 많은 사람이 모여든다.
축제야 시장이야…여자들의 놀이터
이씨가 띵굴시장에서 선보인 목공 장인 이규석 선생의 나무도마(은곡도마), 건강한 조리도구를 위해 주부가 직접 개발한 주물냄비(마미스팟), 김화중 공예가가 만든 모던한 도자기 그릇(화소반) 등은 마켓 손님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지금은 독립 브랜드로 매장을 낼만큼 성장했다. 띵굴시장은 그동안 규모가 점점 커져 25개였던 셀러 수가 3년 만에 200여 개로 늘어났다. 이달 말에는 부산에서 18번째 마켓 개최를 앞두고 있다.
성공한 마켓은 발빠른 기업과 함께 새로운 프로젝트로 진화 중이다. 마켓움은 지난 7월 패션기업 세정과 협업해 라이프스타일 편집 브랜드 ‘동춘상회’를 론칭했다. 띵굴시장은 외식업체 OTD와 손잡고 10월 초 서울 성수동과 을지로에 오프라인 매장을 열고, 온라인 마켓도 상시 운영한다는 소문이다.
마켓에선 셀러와 손님의 구분이 없다. 찾아온 손님뿐아니라 물건을 팔러 온 셀러 역시 물건을 사고 소통하며 즐긴다. 직접 디자인한 주물냄비를 판매하는 엄선희 ‘마미스팟’ 대표는 “물건을 팔면서 짬짬이 다른 셀러의 물건을 구경하고 많이 산다”며 “주로 아이가 먹을 과자나 육아용품을 사는데 어떨 땐 그 양이 너무 많아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직원의 핀잔을 듣는다"며 웃었다. ‘시골여자의 바른 먹거리’ 운영자 양아현씨는 “직접 고객을 만나고 소통하는 게 마켓의 재미”란다.
셀러는 가져온 물건을 시간 안에 다 못 팔면 가격을 낮추거나 필요한 물건을 가져온 셀러와 맞바꾼다. 가져온 물건을 다시 가져가는 데 힘과 비용을 쓰느니 저렴하게라도 팔아 버리고 가는 게 낫다는 판단에서다. 때문에 할인을 노리고 마켓 방문시간을 조절하는 사람도 상당하다.
일반인들이 찾기 힘든 소상공인과 공예가의 물건을 발굴해 소개하는 일도 마켓의 칭찬받을 만한 역할이다. 높은 수수료 때문에 진입장벽이 높은 백화점·마트 대신 마켓은 소상공인의 제품이 세상에 선보이는 데뷔 무대가 된다. 음식 브랜드 '메종드율'은 소스 200병을 만들어 마켓움에 참가했다가 유명해져 지금은 공장을 운영할 만큼 성장했다. 이밖에도 '나무목' '화소반' '은곡도마' '마미스팟' '이로움' 등은 이미 마켓 업계에서 이름난 브랜드다.
이런 마켓의 인기에 대해 전문가들은 "당연하다"는 반응이다. 이향은 성신여대 교수(서비스디자인공학과)는 "모든 소비가 '집'으로 집중되고 있는 최근 트렌드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마켓이 다루는 브랜드가 ‘집 꾸미기’에 적합한 물건들로 여성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여기에 더해 반나절 동안 시간을 보낼 장소와 즐거운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도 마켓의 인기 비결이다. 김용섭 소장은 "흥겨운 장소이자 놀이 공간으로서 마켓이 제공하는 경험을 원하는 이들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마켓에서 물건만 거래하는 게 아니라 소통하는 경험까지 즐긴다는 설명이다. 이 교수 역시 "마켓이 제공하는 경험은 부담 없고 재미도 있어서 환영받는다"고 봤다. 외식 공간 기획을 꾸준히 해온 손창현 OTD 대표는 "미국·유럽·일본 등 해외에서도 많은 사람이 숍 대신 마켓을 찾는다"며 "향후 몇 년간 마켓의 인기는 계속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