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산시(山西)성 쭤취안(左權)현 원터우디(雲頭低)촌에 들어서자마자 마을 초입의 누각 담장을 도배한 한글이 눈에 들어왔다. 담벼락에 남아 있던 글 위에 페인트로 덧칠한 것이었다. 마을 주민 리빙전(李丙珍·56)은 “우리 마을에 조선의용대가 주둔하면서 일본군과 맞서 싸웠다는 얘기를 어릴 때부터 듣고 자랐다”며 “마을에 한글을 아는 사람은 없지만 비바람에 글씨가 희미해지면 다시 칠을 입혀 영원히 지워지지 않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1942년 주둔한 타이항산맥의 자락
여성 포함 150명, 일본군과 맞선 곳
노선 갈등으로 남북서 잊혀진 존재
마을선 한국어로 노래 부르며 기려
누각 담장의 한글은 이 일대에서 대치 중이던 일본군 부대원 가운데 조선인 출신들의 탈영과 귀순을 권유한 글이었다. 나머지 담벽에는 “강제병으로 끌려나온 동포들, 조선의용대가 있으니 총을 하늘로 쏘시오” “조선말을 자유로 쓰게 (일본군 상관에게) 요구하자”는 등의 글씨가 씌어져 있었다. 마을 안에는 순국선열유족회가 2002년 와서 세운 순국선열전적비가 있다.
원터우디에서 북쪽으로 270㎞ 거리에 있는 허베이(河北)성 후자좡(胡家庄)촌의 초등학생들은 ‘조선의용대 추모가’를 한국어 발음으로 부른다. 1941년 12월 일본군이 이 마을까지 침입했을 때 맞서 싸운 대원들을 기리는 행사를 매년 개최하면서 부르는 노래다.
조선의용대가 험준한 타이항산을 근거지로 삼게 된 건 독립운동가들의 노선 다툼과 중국 내 정세가 얽힌 결과다. 1930년대 후반 임시정부 요인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국공합작 아래에서의 중국 임시수도인 충칭(重慶)으로 이동했다. 임정 군무부장이던 약산 김원봉도 그 틈에 있었다. 하지만 무장투쟁론을 굽히지 않았던 약산은 자신의 휘하에 있던 의용대원을 전투 지역인 화북(華北)지방으로 이동시켰고 최전방인 타이항산으로 들어간 조선 의용대는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연계해 활동하게 됐다.
당시 공산당과의 관계는 두고두고 남북에서 조선의용대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해방과 함께 약산은 서울로 귀국했으나 그는 좌익으로 몰려 체포되는 등 탄압 끝에 48년 북으로 갔다. 그는 1958년 무정 등 연안파와 함께 김일성에 의해 숙청됐다.
제 대접을 못받은 건 남한에서도 마찬가지다. 금기시되던 조선의용대 연구가 1990년대에 시작되고 윤세주 등 희생자들에게는 훈장도 수여됐지만 본격적인 재평가는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최근 8·15를 앞두고 베이징 교민들과 함께 타이항산의 조선의용군 유적지를 답사한 정원순 베이징 한인회 부회장은 “우리 국민 누구든 임시정부나 안중근·윤봉길 의사를 기억하고 있지만 가장 치열한 최전선에서 피를 흘리며 조국 독립을 꿈꾸던 젊은 그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타이항산(산시·허베이성)=글·사진 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