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강민석 논설위원이 간다

[강민석 논설위원이 간다]안철수 퇴장하자 문재인 정부-박지원, '협치 채널' 가속

중앙일보

입력 2018.08.03 00:02

수정 2018.08.09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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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석 논설위원이 간다] 당·청의 ‘협치내각’ 물밑에선 무슨 일이

여야의 협치라인인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오른쪽)와 박지원 민평당 의원이 국회 본회의장에서 만나 대화하고 있다. 왼쪽은 개혁입법연대를 주장하는 민평당 천정배 의원. [뉴시스]

문재인 대통령의 집무실 테이블로 6·13 지방선거 이후 여론조사 보고서가 하나 올라왔다. ‘협치’(協治)와 ‘연정’(聯政)에 대한 국민의견을 조사한 내용이었다. 보고서에 따르면 협치에 대해서는 지지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그러나 연정에 대해선 찬성비율이 뚝 떨어졌다.
 
지난달 23일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도 야권인사에게 내각의 문호를 개방하겠다고 밝히면서 연정론에는 선을 긋고 ‘협치내각’이라는 표현을 썼다. 하지만 연정까지는 아니더라도, 추상적인 협치보다 더 나아간 ‘협치내각’이란 개념이 등장한 것만 해도 청와대 기류의 변화다.

청와대 인사, 박지원과 회동서
“협치대상은 안철수 아닌 박지원”

홍영표, 야권 박선숙 입각 추진
박지원은 개혁벨트에 더 관심

“개혁벨트 먼저 만들어 흔들면
바른미래당 호남의원 넘어올 것”

문 대통령은 그간 연정이나 협치 문제에 대해선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야당 지도부를 청와대로 초청해 여러차례 식사를 한 적은 있지만 ‘소통’ 차원의 행보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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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가 복수의 대야 채널을 유지하면서 야권인사 입각을 추진하기에 이르렀다. 홍 원내대표와 청와대 정무라인에서 협치내각 구성을 위한 카드로 검토하는 인사는 박선숙 바른미래당 의원이라고 여권인사들이 전했다.
 
다만 아직 야권에 본격적으로 입각 동의를 구하지는 않은 상태라고 한다. 바른미래당과 민주평화당이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는만큼 현재로선 카드를 쥐고 상황을 주시하는 단계인 것 같다.
 
문 대통령의 협치에 대한 인식이 바뀔 조짐일 보인 건 올 초부터다.
 
지난 1월23일 문 대통령은 민주당 원내대표단만 따로 초청해 청와대에서 오찬을 했다. 외부에는 알리지 않은 일정이었다. 이날 우원식 원내대표는 작심하고 문 대통령에게 “국민의당과의 협치를 강화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한 달 전 끝난 정기국회(작년 12월8일 폐회)에서 우 원내대표는 여소야대의 한계를 실감했다. 상가임대차보호법 개정안 등의 민생입법,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 법안 같은 여권의 핵심과제가 가로막혔다. 120석대의 민주당으로선 야권이 뭉쳐서 반대하면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문 대통령도 “국민의당에는 선거 때의 앙금이 ‘전혀’ 남아있지 않다. 국민의당과 협치를 하라”고 답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전혀’라는 말에 특히 힘을 주었다고 우원식 의원은 전했다. 문 대통령이 국민의당과의 협치 건의에 흔쾌히 사인한 것은 사실상 이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문 대통령의 발언 이후 여권 인사들은 물밑에서 분주히 움직였다. 우 원내대표는 국민의당 박지원 의원을 찾아가 문 대통령의 발언을 알렸다. 문 대통령과 민주당 원내대표단의 오찬회동 2~3일 뒤 ‘청와대 인사’가 박지원 의원을 만났다. 당시 청와대 인사는 박지원 의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대통령께서 앙금을 풀고 협치하자고 하는 것은 안철수 대표가 아니고 박지원 대표님입니다.”
 
안철수 전 의원과는 같이 갈 수 없지만 박지원 의원과는 관계를 복원하겠다는 메시지였다. 박지원 의원도 “나도 그렇게 이해하고 있다”고 화답했다.  
 
청와대-박지원 회동은 지난달 31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난 박지원 의원이 직접 공개한 내용이다. 박지원 의원은 ‘청와대 인사’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지만 임종석 대통령 비서실장이나 한병도 정무수석일 가능성이 크다.
 
문 대통령과 박지원 의원은 각각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비서실장 출신으로 뿌리가 같다. 하지만 2016년 총선, 2017년 대선 과정에서 안철수 전 의원과 손을 잡은 박지원 의원은 스스로 “문모닝(아침 회의를 문재인 후보 비난으로 시작한다는 뜻의 조어)을 했다”고 말할 정도로 집요하게 문 대통령을 공격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에는 남북관계나 적폐청산 작업에 대해 여당 의원 이상으로 방패 역할을 해왔다.
 
반면 안 전 의원과의 관계는 파탄이 났다. 안 전 의원이 박 의원의 반대에도 불구, 바른정당과 손을 잡으면서였다. 안 전 의원과 결별한 박지원 의원에게 청와대가 손을 내민 것은 단순한 감정적 화해 차원을 넘어 ‘안철수-박지원’을 분리하려는 일종의 전략적 시도였다.
 
청와대-박지원 회동 이후 국민의당 분당과 민주평화당 창당 및 지방선거가 있었다. 선거 이후 안철수 전 의원의 퇴장으로 야권 내 ‘반문’의 구심축이 붕괴되면서 협치논의는 속도를 냈다. 청와대 관계자는 “지방선거 이후 야권에서 안철수 전 의원이 퇴장한 것이 박지원 의원과의 협치논의를 본격화하게 만든 계기”라고 말했다.
 
박지원 의원과의 라인은 새로 선출된 민주당 홍영표 원내대표가 맡았다. ‘홍-박(홍영표-박지원) 채널’의 본격적인 가동 속에 협치내각 컨셉트가 등장했다.
 
당초 여권은 협치내각 구성 차원에서 김영록 농림축산식품부장관의 후임도 민평당에 할애하는 방안을 검토했다. 하지만 지방선거 전에 발생한 공백이 너무 장기화되는 걸 우려해 이개호 의원으로 가기로 했다. 이때도 박지원 의원에게 미리 양해를 구했다고 한다. 박 의원은 “농식품부 장관은 이개호로 한다고 알려와 ‘훌륭하니까 꼭 시켜라’고 했다”고 말했다.
 
사실 야당과의 협치내각 구성은 고차방정식이다. 장관 적임자를 찾아내서 검증동의서를 받아 검증을 진행한 뒤, 지명하는 보통의 과정도 난코스다. 그런데 야당 인사를 협치차원에서 입각시키려면 각기 노선이 다르고 내부상황도 복잡한 여러 정당의 동의까지 구해야 한다.
 
‘박선숙 카드’는 그런 점에서 묘수일 수 있다. 그는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과 함께 민청련에서 활동한 재야인사 출신이다. 진보성향 인사라 정의당이 비토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야출신을 영입할 때 국민회의(민주당 전신)에 합류했고, 노무현 정부에서 환경부 차관을 지낸 만큼 범여권 인맥이 두텁다. 박지원 의원과는 ‘박남매’로 불리는 관계다.
 
한때 안철수 전 의원의 측근이었으나 안 전 의원이 바른미래당 창당을 밀어붙일 당시 정치적으로 결별했다. 그렇다고 몸담고 있는 바른미래당을 ‘저격’하는 등의 일은 하지 않은 채 ‘조용한 행보’를 해왔다. 각 당의 동의를 구하기에 적합한 카드인 셈이다.
 
하지만 협치내각이 쉽게 성사될 것이라고 낙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박선숙 카드의 문제라기보다 각 당의 이해관계 충돌이 원인이다.
 
민평당이나 바른미래당, 정의당 등은 협치내각보다는 선거구제 개편이 절실하다. 현행 소선거구제를 중대선거구제로 바꿔야 2020년 총선에서 존속이 가능하다. 그래서 여권의 협치제안을 선거구제 개편연대로 유도하려 한다.
 
박지원 의원의 경우 장기적으로는 민주당과의 연정 내지 통합(합당)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 사전단계로 ‘개혁입법벨트’를 요구하고 있다. ‘민주+민평+정의+무소속=157석’으로 과반을 구성해 입법을 독자적으로 추진하면서 신뢰를 쌓은 뒤 연정으로 나아가자는 주장이다. 그는 최근의 원(院)구성 협상 때도 개혁벨트를 가동해 한국당을 빼버리자고 홍 원내대표를 강하게 압박했다. 무슨 계산에서였을까.
 
“솔직히 바른미래당을 흔들려고 한 거다. 개혁벨트를 가동하면 바른미래당의 주승용 의원 등 호남 7인방들은 이쪽으로 온다. 어차피 유승민 사람들은 한국당으로 간다. 그쪽으로 가라 이거다. 그런데 소수 민주당 정권이 강단을 보여주지 못했다.”(박지원 의원)
 
박 의원의 설명은 개혁벨트로 판을 흔들어 안철수-유승민, 두 주주가 동반퇴진한 바른미래당 내 국민의당 출신들을 합류시키려 한 일종의 정계개편 구상이나 다름 없다.
 
홍영표 원내대표의 입장은 다르다.
 
“박지원 대표는 개혁 벨트 157석으로 독자 원 구성을 해버리자고 했는데, 그렇게 해버리면 (입법을 해야할) 하반기 국회는 전쟁터가 된다. 개혁벨트로 선을 딱 그어놓는 순간 전선이 생긴다.”
 
그렇다고 독자적으로는 여소야대 국회운영이 불가능한 민주당으로선 개혁벨트 요구를 일축하기만도 어렵다. 그래서 당장은 부담스런 개혁벨트보다 협치내각 카드로 민평당 및 바른미래당 일부와 공조의 고리를 만들어 놓고 논의를 이어 가려 한 것이 홍 원내대표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야당은 몸값을 계속 올리고 있다. 박지원 의원은 “협치내각을 한다고 하면서 껄렁한 장관 자리 한두 개 준다는 건 반대라고 두 곳(청와대와 민주당)에 얘기했다”고 밝혔다. 다만 박선숙 의원 입각 문제에 관해선 “아직 그런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홍 원내대표는 박선숙 의원 입각 문제를 포함, "(협치내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개혁벨트냐 협치내각이냐의 ‘밀당’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청와대로선 ‘홍-박 채널’만 바라보며 개각을 마냥 늦출 수만은 없다. 야당 인사의 입각 가능성만 열어놓는 ‘개문발차’(開門發車) 형태로 개각 열차를 먼저 굴러가게 할지 모른다.
 
정치 인사이드
당·정·청은 지금 리셋(reset) 중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전당대회(8월 25일)를, 정부는 개각을 앞두고 있다.
 
이번 문재인 정부 2기 개편과정에선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의 선택이 보이지 않게 ‘나비효과’를 일으키며 개각과 전당대회 밑그림을 바꿔놓았다는 말이 나온다.
 
수면 아래에선 무슨 일이 있었을까. 지난 7월 초순 이해찬 민주당 의원이 주변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외부엔 출마결심이 지연되는 정도로 알려졌지만 “전당대회에 나가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해버렸기 때문이다. 이 의원의 고집은 정치권에서도 유명한 터라 참모들은 속앓이만 했다.
 
불출마하려는 이유는 간단했다. “김부겸이 나오겠다는데 내가 어떻게 나가느냐”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1980년대 재야민주화운동의 구심이었던 ‘민통련’에서 함께 활동한 사이다.
 
하지만 김 장관이 7월18일 전대 불출마선언을 하면서 이 의원이 마음을 바꿨다. 이 의원은 현재 각종 여론조사에서 민주당 대표주자 가운데 1위를 달리고 있다.
 
김 장관은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더 도와달라”고 요청해 불출마를 결심했다는 말이 당내에서 나온다.
 
이제 가시적 실적을 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 문 대통령 입장에선 내각의 안정이 민주당 전당대회보다 중요한 게 사실이다. 일부 부처 장관들의 역량이 기대치에 못 미쳐 불만을 가진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의지해온 몇 안 되는 장관이 김 장관이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의 내각 잔류 요청→김부겸 장관의 불출마 결정→이해찬 의원의 출마선언으로 이어진 여권 내부의 교통정리 결과는 야권에도 영향을 미쳤다. 민주평화당 대표경선에 출마한 정동영 의원은 통화에서 “이해찬 의원 덕을 보게 생겼다”며 “당원들이 이해찬을 상대하려면 정동영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들 한다”고 전했다.
 
바른미래당 대표 경선(9월 2일)에는 손학규 전 의원의 등판이 초읽기 상황이다. 이 의원의 등판이 직접 영향을 미쳤다곤 할 수 없지만 운신을 자유롭게 한 측면은 있다. 공교롭게 이해찬-정동영-손학규 세 사람은 2007년 대통합민주신당(민주당 전신) 대선후보 한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관계다.
 
강민석 논설위원 
 
※정치부 강태화 기자와 공동으로 취재를 진행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