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부산에서 태어난 노 원내대표는 1973년 경기고에 입학하며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1학년 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신에 반대한다는 유인물을 뿌렸다. 당시 함께 했던 이가 동기였던 이종걸 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노 원내대표는 87년 6월 항쟁 이후 인천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이 출범하는 데 주축 멤버로 활동했다. 노동자의 정치 세력화가 목표였다. 하지만 경찰은 이 활동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적용해 노 원내대표를 89년 검거한다. 노 원내대표는 법정에서 “나는 사회주의자”라고 말했다. 그는 2년 6개월간 복역했다.
노 원내대표는 2000년 권영길 전 의원과 함께 민주노동당을 창당하며 제도권 정치에 본격 도전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선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민노당 바람’을 이끌었다. 노 원내대표가 대중적 인기를 얻은 것도 이때다. 방송 토론에서 보여준 촌철살인 말솜씨가 화제가 됐다. 그는 한나라당을 향해선 “삼겹살도 50년 동안 같은 판에 구우면 타 버리니 갈아야 한다”고 했고, 열린우리당을 향해선 “한 일도 없이 인기가 올라가는 횡재를 했는데 길 가다 지갑 주웠으면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고 일침을 놨다. 노 원내대표의 활약 등에 힘입어 17대 총선 당시 민노당의 비례대표 정당 득표율은 13%까지 올랐다. 그는 비례대표 8번으로 국회에 입성했다.
노 원내대표는 2016년 20대 총선에서 경남 창원성산을 지역구로 내려가 새누리당 후보를 꺾으며 다시 원내로 진입했다. 그는 정의당 3ㆍ4기 원내대표를 내리 맡는 동안 당 지지율을 두자릿수로 끌어올리며 ‘진보진영의 아이콘’으로 입지를 굳히는 듯했다. 하지만 ‘드루킹’ 김동원씨 측으로부터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혐의가 특검 수사 중 불거지면서 노 원내대표의 발목을 잡았다.
그가 생의 마지막으로 택한 곳은 모친 집이었다. 모친은 그의 가장 든든한 지지자였다. 노 원내대표가 고려대 재학 시절 노동운동을 하겠다고 선언하자 모친은 “노동운동 하려면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을 잘 알아야 한다”며 아들을 위해 노동계 신문 기사를 스크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노 원내대표는 2004년 총선을 준비하며 민노당 홈페이지에 ‘선거대책본부 일기’를 올렸다. 그는 한 일기에서 모친이 선거구호를 정하는 데 조언을 준 사례를 소개하며 “못난 아들 때문에 노모의 고심이 크다”고 썼다.
윤성민 기자 yoon.sungm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