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역 시위 갔다고 알바 잘리고, 페미 글 퍼날랐다고 징계 당해

중앙일보

입력 2018.07.10 02:30

수정 2018.07.11 0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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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기획

지난 5월부터 유튜브에 페미니즘 관련 영상을 올리기 시작한 제이미(25·활동명)는 얼마 전 댓글창을 닫았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심한 욕설과 협박 댓글에 시달려서다. 제이미가 올린 것은 긴 머리를 직접 짧게 잘라 인증한 일명 ‘탈코르셋’ 영상이었다. 남성 네티즌들이 주로 활동하는 커뮤니티에서는 제이미의 개인 신상까지 캡처돼 돌아다녔다. 제이미는 큰 공포감에 시달렸다. 그는 “댓글을 보면서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을 정도로 마음이 힘들었다”며 “내가 내 머리 자르고 화장 안 한다는 게 왜 그리 화낼 일인지 모르겠다”고 털어놨다.
 
최근 온라인에는 커피전문점 이디야의 한 가맹점에서 근무하던 아르바이트 여성 근로자가 혜화역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에 갔다 왔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다는 글이 올라왔다. 글을 쓴 네티즌은 회식 중 점주에게 “혜화역 시위에 갔었다”고 하자 “이제 출근하지 말고 알바 대신 중요한 시위나 가라”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네티즌들의 항의가 쏟아지자 이디야 본사 측은 “가맹점주가 사실을 모두 인정하며 진심 어린 사과를 했고 근무자는 이를 받아들였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냈다.

뉴페미니스트 엇나간 혐오
‘탈코르셋’ 올린 유튜버 악플 시달려
지방선거 땐 28세 신지예 벽보 훼손
청소년 페미 학폭 경험담 3000개

2005년 호주제 폐지 때도 거센 반발
“성 갈등 넘어 소통하는 운동 필요”

2016년 넥슨 게임 캐릭터 성우였던 김자연씨는 트위터에 메갈리아 후원 티셔츠 인증샷을 올렸다는 이유로 교체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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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운동이 확산되면서 이에 반발하는 심리 또한 커지고 있다. 단순히 반발하는 데 그치는 것을 넘어 물리적인 반격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몇몇 전문가는 이를 페미니즘을 향한 ‘백래시(backlash)’로 풀이한다. 백래시는 사회·정치적 변화에 자신의 영향력이 줄어든다고 느끼는 불특정 다수의 반발을 뜻한다. 앞서 지난달 2일에는 페미니스트 후보임을 내세웠던 신지예 전 녹색당 서울시장 후보의 벽보가 훼손됐다. 경찰에 붙잡힌 취업준비생 A씨(30)는 범행 동기에 대해 “여권(女權)이 신장되면 남성 취업이 어려워질 것이라는 생각에 벽보를 훼손했다”고 진술했다.
 
소비자 다수가 남성인 게임업계에서는 이런 일들이 오래전부터 계속됐다. 2016년 넥슨에서는 게임 ‘클로저스’의 신규 캐릭터 목소리를 맡았던 성우 김자연씨가 자신의 트위터에 여성 혐오 반대 사이트인 ‘메갈리아’를 후원하는 티셔츠 인증샷을 올렸다는 이유로 교체돼 논란이 됐다. 게임 제작사 IMC게임즈 김학규 대표는 지난 3월 게임의 원화 작가 B씨가 여성단체 계정을 구독하고 ‘한남’(한국남자)이라는 표현이 들어 있는 글을 리트윗했다는 이유로 B씨와 징계성 면담을 진행한 뒤 이를 홈페이지에 공개했다. 트위터에서는 “시대착오적 사상 검증”이라는 비난이 쇄도했고 김 대표는 결국 사과문을 올렸다.


취업준비생 A씨가 ’여권이 신장되면 남성 취업이 어려워질 것 같았다“며 신지예 서울시장 후보의 벽보를 훼손. [연합뉴스]

페미니즘에 대한 반발 정서는 대학 내 총여학생회의 존폐 문제로도 퍼졌다. 연세대에서는 지난달 학생 총투표를 통해 ‘총여학생회 개편안’이 통과됐다. 총여학생회가 페미니스트 작가 은하선씨의 강연을 추진한 게 문제가 됐다. 몇몇 학생이 ‘은씨가 남성 혐오를 조장하고 십자가 모양의 자위 기구 사진을 SNS에 올렸다’며 그의 강연을 반대했다. 지난달 13일부터 사흘 동안 진행된 총투표에서 82.24%가 총여학생회 개편에 찬성했다. 이 기간에 교내에 걸려 있던 총여학생회 지지 현수막 등은 칼로 찢긴 채 발견되기도 했다.  
 
10대 청소년 사이에서는 SNS에 ‘#청소년페미가_겪는_학교폭력’ 해시태그를 달고 피해 사례를 폭로하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29일 해시태그 운동이 시작된 이후 3000개 가까이 경험담이 올라왔다. 주로 남학생들이 학교에서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여성혐오 표현들에 대한 고발과 교내에서 페미니스트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겪게 되는 폭력에 대한 글이 많다. 트위터에 글을 올린 한 학생은 “친구와 페미니즘 동아리 홍보물 20장을 전교에 붙였는데 그중 19장이 사라지고 나머지 한 장에는 ‘김치×, 삼일한(여자와 북어는 3일에 한 번씩 맞아야 한다는 뜻), 메갈×’ 등의 욕들이 적혀 있었다”고 털어놨다.
 

아이돌 레드벨벳 멤버 아이린이 소설책 『82년생 김지영』 읽었다고 밝히자 일부 남성 네티즌이 아이린의 사진 불태워.

아이돌 레드벨벳의 멤버 아이린은 팬미팅 자리에서 “책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있다”고 밝힌 이후 악성 댓글에 시달렸다. 일부 남성 네티즌은 아이린의 사진을 불태운 인증샷까지 올렸다. 손희정 문화평론가는 책 『대한민국 넷페미사』를 통해 한국 사회의 페미니스트란 ‘텅빈 기표’ 같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는 “실재하진 않지만 어딘가에 있는 것처럼 폄하하며 호명되는 ‘김치녀’처럼 이 사회가 원치 않는 여성의 이미지들이 합쳐진 어떤 뭉텅이가 바로 페미니스트”라고 적었다.
 
17년째 성폭력 예방 강사로 일하고 있는 손경이(47)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전문강사는 “요즘 강의에 들어가면 ‘무고죄도 있는 것 아닌가요?’ ‘꽃뱀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등 ‘공격을 위한’ 질문이 부쩍 늘었다”고 했다. 그는 “이런 반발들을 볼 때마다 왠지 ‘너 예전엔 착했는데 왜 이렇게 변했어?’라며 여자친구를 원망하는 전 남자친구의 모습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과거에도 페미니즘 운동이 거세질 때마다 반발 심리는 늘 따라붙었다. 한국은 2005년 호주제가 폐지된 이후가 대표적이었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당시 ‘이만큼 내주면 된 거 아니냐’는 반발과 함께 역차별론이 급부상해 여성운동이 크게 위축됐다”고 전했다. 20세기 초 영국에서 여성 참정권을 주장하는 ‘서프러제트’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1960년대 미국에서 제2세대 여성해방 운동이 등장했을 때도 여성에 대한 낙인과 폄하 여론이 들끓었다.
 
전문가들은 “페미니스트들이 바라는 사회가 제대로 정착하려면 성별 갈등을 부추기는 운동 방식을 넘어선 소통이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다만 이 갈등을 단순히 ‘남혐 대 여혐’의 프레임으로 보는 건 맞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이택광 경희대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는 “남성들이 페미니즘을 보며 느끼는 불쾌함은 여성들이 사회 전반의 여성 혐오로 느끼는 위협들과 비교할 수 없다”며 “이 두 혐오가 나란히 붙어 마치 동등한 것처럼 여겨지는 착시가 발생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홍상지·성지원 기자 hongsam@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