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대표 유림 4인 위패 한자리에…8월 초 사당 상량식
8월 초로 예정된 상량식에는 갓을 쓰고 도포를 걸친 퇴계·서애·학봉·대산의 문중과 후학들이 참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위패가 봉인될 사당은 중국산 등 외국산이 아니라 국내산 소나무와 한식 기와를 이용해 지어진다.
8월 초 호계서원 사당 상량식 예정
조선 대표 유림 4인 위패 한자리에
이렇게 호계서원 사당에 조선을 대표하는 유림 4인의 위패가 한 번에 봉인되기는 쉽지 않았다. 꼬박 200여년이 걸렸다. 호계서원과 유림 4인을 둘러싸고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던 걸까.
일부 유림은 영의정까지 지낸 서애가 윗자리인 퇴계 왼쪽에 와야 한다고 했고, 반대 측 유림은 나이가 네 살 많은 학봉이 와야 한다고 했다. 학봉은 관찰사를 지냈다.
본격적인 반목과 갈등은 1812년 불거졌다. 학봉의 후학들이 호계서원 사당에 영남학파의 대표 유학자인 대산 이상정(1711~81)의 위패를 추가로 봉인하자는 주장을 제기하면서다. 수면 아래에서 갈등하던 유림 사이에 반목은 공론화됐다.
당시 국정을 손에 쥐고 있던 흥선대원군이 중재를 시도할 정도였다. 1871년 흥선대원군은 유림 간 중재가 어렵자, 호계서원을 철폐했다.
익명을 원한 한 학자는 "퇴계를 위한 서원을 두고, 병호시비가 생겼다. 이를 두고, '바람직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이 일에 대해서는 묻어둬라. 말도 꺼내지 말라'는 말을 과거 척암 김도화 등 일부 유학자가 이야기 했을 만큼 내부적인 지적이 나오기도 했다고 전해진다"고 했다.
1871년 사라진 호계서원은 이후 7년 뒤 위패를 봉인하는 사당 없이 단순히 서원 강당만 안동에 복원됐다. 그러다 안동댐 건설로 1973년 안동시 임하댐 아래로 옮겨 세워졌다. 이후 훼손이 우려돼 이전해 새로 복원해야 한다는 요구가 잇따라 지난 2013년 현재 호계서원 복원 공사 터로 옮겨 세워졌다.
당시 길이 2m가량의 두루마리에 한문으로 쓴 합의문에 갓을 쓰고 도포를 걸친 유림이 모여 도장까지 찍었다고 한다. 조선을 대표하는 유림 4인의 위패가 봉인되는 사당이 생긴 배경이다.
안동에서 나고 자란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은 둘 다 퇴계의 수제자다. 학봉은 임진왜란 발발 전 통신 부사로 일본을 다녀왔으며 임진왜란 당시 경상우도 초유사로 적과 싸우던 중 병사했다.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으로 선조를 보필하며 국난을 극복한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안동=김윤호 기자 youknow@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