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시절 여권의 핵심이었던 JP는 야당 지도자 YS·DJ와 대립했다. JP가 만든 중앙정보부는 1973년 DJ를 일본에서 납치했다. 당시 국무총리였던 JP는 이를 몰랐다고 하나 역사의 악연임은 분명하다. JP는 YS와 62년에 처음 만났다. YS를 공화당에 합류시키려고 “우리 혁명세력과 같이합시다”고 설득했으나 거절당했다고 한다. 당시 YS는 “전부 다 군사정권 세력에 휩쓸리면 발전이 없다. 반대하는 세력도 있어야 하니 나는 지금 걷는 길을 가겠다”고 답했다고 JP는 회고했다. 79년 YS의 국회의원 제명안이 국회에 올라왔을 때 당시 공화당 상임고문이었던 JP는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졌다. JP는 2015년 중앙일보에 기고한 회고록에서 “바깥 세상에서 보면 나와 YS가 상호 적대적인 관계였다고 봤겠지만 우리는 그런 식으로 동년배의 우정 같은 걸 교환했다”고 적었다.
정적·동지 넘나든 3김 인연 40년
5·16 뒤 YS에 “혁명세력과 함께하자”
DJ 피랍 당시 총리 … “납치 몰랐다”
조력자로 설계자로 ‘영원한 2인자’
“지역감정 구태 정치” 비판받기도
그러나 이후 민자당 내 YS계가 노골적으로 JP 축출운동에 나서자 JP는 YS와 손을 끊고 95년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했다. 이번엔 3김이 DJ·JP와 YS의 대결 구도로 바뀌었다. 97년 11월 3일엔 DJ의 국민회의와 JP의 자민련이 야권 후보 단일화 합의문 선언 및 서명식을 했다. 이른바 DJP연합이다. DJ는 15대 대통령에 당선됐고 충청표를 DJ에게 몰아준 JP는 공동정부의 2인자로서 국무총리에 취임했다.
3김 정치는 지역정치와 불가분의 관계다. 그래서 JP는 DJ·YS와 마찬가지로 권력기반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지역감정(충청권)을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95년 지방선거때 ‘충청도 핫바지론’이 대표적 사례다. JP가 YS·DJ를 상대로 내각제를 권력연합의 협상카드로 활용하는 바람에 국민에게 ‘내각제=권력놀음’의 이미지를 심어준 것도 그의 과오로 꼽힌다. 또 2인자 위치에 안주하는 듯한 JP식 정치는 점점 유권자들에게 ‘구태’로 비쳐졌고 결국 2004년 총선 때 자민련의 몰락을 가져오는 요인이 됐다.
JP는 중앙일보 회고록에서 3김 정치에 대해 “조물주가 나를 (3김의 마지막 생존자로) 남겨놓은 이유는 마무리를 잘하라는 뜻일 것이다. 그 마무리가 무엇인지는 나도 모른다. 어쩌면 ‘오호(嗚呼)라, 과연 이것이 나 자신이 걸어야 했던 길이냐’는 자탄(自嘆)이 일어날 수도 있고 ‘그래도 미숙하나마 이것으로 만족하라’는 뜻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
3김 정치에 대한 평가가 어떻든 JP의 타계로 3김 시대가 완전히 종식되고 역사의 뒤안길로 물러나게 됐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김승현 기자 shy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