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문재인 대통령은 꽤 근사한 당근을 준비했다. 그는 4·27 남북 정상회담 때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이 담긴 USB(이동식 저장장치)를 김정은에게 건넸다. 이 구상은 서해(목포~신의주), 동해(부산~청진), 접경지역(인천~강릉~함흥) 3개 축으로 남북 간 교통·에너지망 연결과 산업경제 벨트를 구축하는 남북 경제협력의 청사진이다. 여기에 수십~수백조원의 천문학적 돈이 투입된다.
6·12 센토사 담판 계기로 찾아온
분단 70년만 절호의 기회를 살려
이질적 정치·경제 체제 완화하는
남북 김치공동체 실험 추진하자
1950년대 유럽의 ‘공동체(Community)’ 모델은 유익하다. 유럽인들에게 제1, 2차 세계대전은 악몽이었다. 5000만 명이 학살된 야만의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를 갈망했다. 전쟁 방지, 평화 구축, 경제 재건이라는 공동의 목표 아래 프랑스와 ‘전범’ 독일은 공존의 손을 잡았다. 51년 4월 프랑스·서독·이탈리아 등은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창설하기로 서명했다.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석탄과 철강을 공동 관리에 둠으로써 전쟁을 막고 평화를 지키자는 취지였다. 공동체 순항에 자신감을 얻자 ECSC 회원국은 57년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와 유럽경제공동체(EEC)를 설립했다. 원자력·핵 에너지의 개발과 분배를 Euratom에 맡기고, 관세동맹을 중심으로 EEC 안에서 자유무역이 이뤄졌다. ECSC·Euratom의 평화와 EEC의 번영을 표방한 유럽공동체(EC)는 ‘하나의 유럽’을 향한 지난한 여정에 들어갔다.
‘김치공동체’가 하나의 방안으로 떠오른다. 비정치적이고 실현 가능성이 큰 분야이기에 제격이다. 김치는 남북을 아우르는 음식문화의 상징이다. ‘김치 종주국’ 한국은 연간 1000억원대 김치를 중국에서 수입한다. 지난해 25만t에 1억2000만 달러(약 1400억원)의 중국산 김치를 들여왔다. 우리가 북한에서 김치공장을 가동해 북한 김치를 국내로 반입하고 야채·고추·비료 재배 등 첨단 농업기술을 전수하면 된다. 김치를 매개로 인적·물적 자원이 자유롭게 남북을 오가는 공동체 시장을 형성하는 것이다. 성공적 모델은 다른 산업으로 파급된다. 전쟁 무기로 전용될 자원들을 함께 활용하는 ‘석탄철강원자력공동체’도 시도해봄 직하다. 남한의 기술과 자본, 북한의 노동력과 자원을 공유하며 전쟁을 차단하는 접근법이다.
과거처럼 합의와 파기가 반복되지 않도록 할 장치가 필요하다. ‘선언’ ‘합의’ ‘성명’은 이행이 없으면 휴지 조각의 다른 말에 불과하다. 오늘날 유럽연합(EU)이 되기까지 유럽은 ‘조약(Treaty)’으로 서로를 묶어놓았다. 문 대통령과 트럼프가 물러나면 그들의 선언 또한 사문화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문 대통령이 김치공동체를 남북이 국가 대 국가로서 맺는 첫 경제조약으로 체결하도록 김정은을 설득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현 정부는 아시안게임 단일팀 구성, 6·15 남북공동행사 등 이벤트에 매달리고 있다. 남북은 휴전선을 맞대고 분단된 지 70년이나 됐다. 함께 손잡고 노래하고, 한 팀으로 운동장을 휘젓는다고 분단과 냉전의 벽이 허물어지겠나. 원치 않는 급격한 통일은 비극이다. 적대적 정치제도와 이질적 경제체제를 완화하고 동질성을 찾는 남북 공동체 실험은 그래서 도전해볼 만하다. 그게 평화와 번영을 위한 최상의 당근이라고 유럽 역사는 증명한다. 우리도 천천히 서두르자, Festina lente.
고대훈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