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여성정책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실제 임신을 중단한 적이 있는 여성의 과반수 가까이는 낙태가 불법이란 사실 때문에 안전하게 시술을 할 수 있는 의료기관을 선택하는데 제약을 받았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낙태 방법·비용·부작용 등 궁금증을 풀어 줄 정보를 얻는데도 제약을 받았다고 답했다. 또 40% 이상이 낙태 시술 후 부작용이 생겨도 시술한 의료기관에 떳떳하게 처치를 요구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고 했다.
청와대에 낙태죄 폐지 국민청원
헌재도 처벌 조항 공개변론 시작
“낙태 허용 확대·폐지” 주장 늘어
여성 건강권이 논의의 중심 돼야
최근 가장 주목할만한 사례는 아일랜드다. 국민의 약 80%가 가톨릭 신자인 아일랜드는 유럽에서도 낙태를 가장 엄격하게 금지해온 나라다. 2012년 즉시 임신중단이 필요한 임신부가 낙태가 불법이라는 이유로 태아가 자연사할 때까지 시술을 미루다가 사망하자 낙태 합법화 논란이 불붙었다. 2013년 산모의 생명에 심각한 위험이 있을 경우 낙태를 허용하도록 했으나 여전히 불충분하다는 여론이 제기됐다. 결국 지난 25일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66.4%가 낙태죄 폐지에 찬성했다. 이로써 35년간 존치해온 낙태금지법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그러나 반대 측(법무부)은 “태아의 생명권도 중요하며, 낙태의 급격한 증가를 막기 위해서는 처벌이 불가피하고, 모자보건법에서 예외적으로 낙태를 허용하고 있는 만큼 현행법은 유지돼야 한다”고 반박한다.
낙태죄 조항의 위헌 여부에 대해 헌재는 2012년 8월 당시 재판관 4대 4 의견으로 합헌이라 결정했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그때와 사뭇 다르다. 이번 아일랜드 사례처럼 낙태의 비범죄화가 국제사회에서 설득력을 얻고 있고, 지난 3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CEDAW)가 한국 정부에 보낸 최종 권고문에도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리얼미터가 2010년과 2017년에 낙태 허용 확대 및 폐지 의견을 조사한 결과를 비교해 보면 낙태의 비범죄화에 공감하는 응답자 비율이 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성(2010년 43.7%, 2017년 59.9%)뿐만 아니라 남성(2010년 29.7%, 2017년 37.4%)도 마찬가지였다.
현 정부(여성가족부)는 여성의 자기결정권, 재생산권 및 건강권에 중대한 침해를 가하는 현행 낙태죄 조항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서를 처음으로 헌재에 제출했다. 헌재의 결론은 공개변론 이후 3개월 이내에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그렇다면 9월 이전에 결론이 나올 가능성이 높다. 어떤 결론에 이르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이제는 이분법적 논의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건강권과 생명권을 위협받는 여성이 이번 논의의 중심이 돼야 한다.
김동식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젠더폭력·안전연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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