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경학의 맥주에 취한 세계사
“여러분이 바로 나이고, 내가 곧 여러분입니다. 우리가 모두 독일입니다. 위대한 조국을 위해, 우리의 등에 칼을 꽂은 유대인을 척결합시다.”
히틀러, 나치당 행사·집회 맥줏집서 개최
맥주에 취한 대중, 쉬운 연설로 휘어잡아
뮌헨 ‘호프브로이하우스' 대표 집회 장소
400년 넘는 역사… 세계 최대의 맥줏집
히틀러에 대한 대중의 열광적인 호응에는 무엇보다 맥주의 힘이 컸다. 독일 정부가 옥외 집회와 시위를 금지한 ‘사회주의 법령’을 폐지하자 히틀러는 기다렸다는 듯이 맥줏집을 집회장소로 이용했다. 독일노동자당 본부를 맥줏집 지하실에 차렸으며, 이후 창당한 국가사회주의노동당(일명 나치당)의 행사와 집회도 수천 명이 입장 가능한 뮌헨의 대형 맥줏집을 돌며 개최했다.
히틀러의 맥줏집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의 손에는 반드시 맥주잔이 들려있었다. 집회가 반드시 평화적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노선을 놓고 나치당의 좌파와 우파는 여러 차례 충돌했다. 흥분한 군중이 패싸움을 벌일 때면 맥주잔이 마치 포탄처럼 날아다녔다.
그때나 지금이나 독일인에게 맥줏집은 단순히 술을 마시는 곳이 아니다. 교류의 장이다. 특히 1차 세계대전 패배로 좌절에 빠진 독일인에게는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갈 힘을 찾는 곳이었다. 맥줏집은 일종의 교회였고, 소속감을 확인하며 위안을 얻는 장소였다. 맥줏집에 나타난 히틀러가 자신이 독일민족을 이끌어갈 지도자라고 주장하며 구원자처럼 행세할 수 있었던 까닭이다.
젊은 날의 히틀러는 노숙자 생활을 전전했다. 히틀러에게는 실패의 책임을 돌릴 대상이 필요했다. 유대인과 부패한 정치가, 외국인에게 화살을 돌렸다. 히틀러는 감옥에서 쓴 자서전 『나의 투쟁』에서 “제대로 독일어 발음조차 못 하는 이방인들이 신성한 제국 의회에서 연설하는 것은 모독”이라고 분개한 뒤 “기생충인 유대인을 박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쟁의 열병을 앓던 그는 1차 대전이 발발하자 기다렸다는 듯 입대했다. 서부전선에서 맹활약하다 전쟁 막바지에 연합군이 살포한 가스를 마시고 눈과 목을 다쳤다. 그때부터 쇳소리가 나는 목소리를 갖게 됐다. 히틀러는 1급 철십자 훈장까지 받고 조국으로 돌아왔지만, 그를 기다린 것은 사회의 냉대와 암울한 현실이었다.
패전으로 독일이 치른 대가는 혹독했다. 군인과 민간인 200만명이 희생됐고, 국토의 13%를 잃었으며,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수레 가득 돈을 싣고 가야 겨우 식빵 한쪽을 살 수 있었다. 독일인의 상실감을 파고든 것이 히틀러의 연설이었다. 히틀러는 맥주에 취해 알딸딸해진 대중 앞에서 쉬운 문장과 귀를 자극하는 독특한 목소리로 연설했다. 그리고 쉽게 그들을 휘어잡았다. 중요한 정치적 결단을 내릴 때는 수천 명 앞에서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켠 뒤 맥주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쳐 사뭇 비장한 상징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히틀러의 극우 민족주의에 동조해 인종 학살에 동참하거나 방관한 독일인도 알고 보면 대부분이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이었다. 노벨문학상을 받은 소설가 하인리히 뵐(1917~85)의 말처럼 ‘패전과 독일의 혼란이 히틀러라는 괴물을 만든 것’이다. 그 괴물은 독일인이 좋아하는 맥주의 효과와 맥줏집의 이미지를 철저히 이용했고 독일인은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독일 뮌헨 슈바빙의 맥줏집과 중세 양조술의 전통을 계승한 유럽 수도원을 순례하며 맥주를 배웠다. 2002년 국내 최초의 하우스 맥주 전문점 ‘옥토버훼스트’를 창업했다. 현재 장애 어린이 재활을 위한 ‘푸르메재단’ 상임이사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