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 수사 맹활약 형제 경찰…휴가 반납하고 ‘밤토끼’잡아

중앙일보

입력 2018.05.25 00:01

수정 2018.05.25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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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찰청 권효진 경사(왼쪽)는 지난 16일 형인 경남경찰청 권충현 경사와 함께 국내 최대 웹툰 불법사이트 '밤토끼' 운영자를 검거했다. [사진 부산경찰청]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갈 순 없잖아.”
 
지난 15일 부산경찰청 사이버수사대 권효진(32) 경사가 국내 최대의 웹툰 불법유통 해외사이트인 ‘밤토끼’ 운영자를 검거하기 위해 10시간 잠복했지만 실패하자 형이 던진 격려의 한마디다. 형은 경남경찰청 사이버수사대 권충현(34) 경사다. 

부산경찰청 권효진 경사, 형 권충현 경사
국내 최대 웹툰 불법사이트 운영자 검거

밤토끼는 하루 평균 116만명이 접속해 유료 웹툰을 무료로 불법 다운받는 사이트다. 국내 대부분의 웹툰 작가들이 피해를 봤다. 밤토끼 운영자는 국내 웹사이트 방문자 순위 13위를 내세워 배너광고 1개당 1000만원을 받는 등 2016년 10월부터 1년 6개월간 9억5000만원의 부당이득(광고수익)을 챙겼다.  
 
가끔 밤토끼를 이용하기도 했던 권 경사는 “웹툰을 무료로 다운받게 하면서 엄청난 부당이득을 챙기는 운영자를 꼭 잡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지난 1월부터 수사에 나선 권 경사는 머리를 식힐 겸 지난 15일 형과 함께 2박 3일 일정으로 제주도를 갈 참이었다. 하지만 폭우로 한라산 등반이 어려워지자 비행기 티켓을 취소하고 형과 함께 인천으로 향했다. 밤토끼 운영자 주거지가 인천 남동구 구월동으로 추정됐기 때문이다. 지난 1월부터 28번의 압수 수색과 10여 차례에 걸친 탐문조사로 알아낸 정보였다.  


범인이 주거지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권 경사는 형과 함께 범인이 대포통장의 돈을 주로 인출하는 인천의 한 현금자동입출금기를 찾았다. 10시간 넘게 잠복했지만 범인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 형이 형사의 촉을 발휘해 “오늘은 안 온다. 하지만 내일은 반드시 온다”고 동생을 격려했다.  
 
다음날인 지난 16일 권 경사는 현금자동입출금기 주변을 탐문했다. 형이 “빈손으로 갈 수 없다”며 의지를 불태워서다. 권 경사는 주변 CCTV(폐쇄회로TV)를 일일이 뒤졌다. 현금자동입출금기에 찍힌 사진으로 범인의 얼굴을 익힌 그는 CCTV 40개를 뒤진 끝에 범인이 생활용품점에서 신용카드로 결제한 사실을 알아냈다.
 
범인은 경찰 단속을 피하기 위해 불법 사이트에서 일차적으로 유출된 웹툰만을 자신의 사이트에 올리고 거의 현금만 쓸 정도로 범행에 치밀했다. 그동안 신원이 드러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용카드를 쓴 사실을 권 경사가 결국 찾아낸 것이다. 범인의 신원을 확보한 권 경사는 개인정보를 조회해 은둔지를 찾아내 범인 허모(43)씨를 체포했고, 저작권법 위반 등 혐의로 지난 24일 검찰에 송치했다. 
 
그는 “형이 휴가를 포기하고 끝까지 함께 해줘서 범인을 잡을 수 있었다”며 “형이 입버릇처럼 ‘기적이 일어나기 2초 전에 포기하지 말자’고 한 말이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불법사이트 '밤토끼' 운영자를 검거한 부산경찰청 사이버수사대 2팀원들. (왼쪽부터) 문성식 경사, 황성민 경사 ,권효진 경사, 최호준 경위. [사진 부산경찰청]

2009년 부산지방경찰청에서 경찰생활을 시작한 권 경사는 홍보팀에서 2년, 수사 파트에서 5년을 일했다. 홍보팀 근무 당시 ‘스토리텔링’으로 알기 쉽게 사건을 시민에게 홍보하면서 주의를 당부해 ‘시민과 소통하는 SNS 경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이후 사이버수사에 두각을 드러낸 권 경사는 3년째 사이버 업무를 맡고 있다. 
 
형 역시 경남경찰청 사이버수사대 소속으로 지난 4월 국내 최대 규모의 음란물 사이트 중 하나인 ‘쿠쿠다스’ 운영자를 검거하는 등 맹활약하고 있다. 이들은 경찰 가족이다. 권 경사의 아버지 권환우(56)씨는 경찰로 33년 근무한 후 2011년 명예퇴직했다. 권 경사는 “모든 사건을 내 가족이 피해자라는 생각으로 수사하겠다”며 집념을 보였다.  
 
부산=이은지 기자 lee.eunji2@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