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존하는 원각사 10층 석탑(국보 제2호)과 대원각사비(보물 제3호)의 정교함과 화려함은 원각사의 위상을 짐작하게 한다. 연산군 때 폐쇄된 뒤 원각사는 한양 도성에서 사라졌지만, 그 이름은 1908년에 탄생한 최초의 근대식 극장의 이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탑골공원의 1919년 3·1 만세운동
대한민국을 낳은 역사적 의미 커
내년 100주년 계기로 교훈과
역사성 보존하며 새롭게 꾸며야
우리가 배웠던 근대사는 한때 나라를 잃기는 했지만 보잘것없는 나라가 아니었음을 알려주면서도 위정자의 약점을 덮으려는 의지가 반영된 역사였다. 도구화된 근대사는 많은 부분을 외국의 연구에 의존했고 이로 인해 한국 근대사는 식민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만세운동은 일제의 침략에 굴하지 않았던 저항의 증거로만 암기됐을 뿐 만세운동의 뿌리와 정신이 해방과 민주화 그리고 오늘의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로 이어지지 못했다.
탑골공원이 중요한 것은 공원이어서가 아니다. 세계 열강의 각축 와중에 주권을 지키기 위해 선진 제도를 받아들이고 고군분투하며 근대 국가의 길로 나아가고자 했던 대한제국의 의지가 투영된 곳이기 때문이다.
1910년에 주권을 빼앗기면서 탑골공원이 일상의 공간으로 바뀌었지만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이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았음을 만천하에 드러냈다.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들불처럼 전국으로 퍼졌고 뜻있는 외국인을 통해 세계에 알려졌다.
그런데 탑골공원의 현실은 어떤가. 종로와 삼일대로가 교차하는 요지에 위치하지만, 우리의 시선이나 발걸음은 공원을 향하지 않는다. 해방 이후 첫 3월 1일에 탑골공원에서 ‘삼일 기념 대음악회’가 개최된 적이 있지만, 공원은 곧 방치됐다. 1967년 공원이 번듯하게 정비됐지만, 공원 주변은 2층짜리 상가건물로 둘러싸였다. 만세운동의 목격자였던 공원 정문은 동숭동으로 쫓겨나고 그 자리에는 강릉의 객사문(客舍門)을 닮은 문이 세워졌다.
불법 논란 속에 ‘불도저 시장’이 주도해 건축됐던 상가건물은 결국 철거됐지만, 주인을 쫓아낸 문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돌로 만들어진 울타리가 공원의 경계를 이루면서 공원은 여전히 시민들의 자유로운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경직된 제도로 관리되는 탑골공원의 역사와 정신이 우리와 멀어지는 것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내년이면 3·1 만세운동 100주년이 된다. 지난 100년간 3·1운동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였어야 했을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탑골공원이 새로운 모습으로 꾸며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해방 이후 우리는 역사와 시대정신을 끊임없이 이야기해왔지만, 역사와 함께 하는 삶에 익숙하지 않다. 과도하게 보호되고 이념화되는 역사의 현장 속에 세대를 이어가는 역사의 교훈은 사라지고 형식만 남겨지는 일이 흔하다. 다음 세대에 역사의 부채를 넘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탑골공원의 역사성을 제대로 보존하고 알리는 방법을 찾는 일을 서둘러야 한다.
안창모 경기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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